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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대표선수의 수상한 귀환, <혈의 누>의 차승원

한국 코미디영화의 대표선수가 돌아왔다. 그것도 웃음 한점 없이 조선시대 수사관의 굳은 표정으로. 바특하게 자른 헤어스타일로 성큼성큼 스튜디오에 들어서며, 전 국민이 광고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 좋은 미소로 시원스레 인사한다.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특사> <선생 김봉두> <귀신이 산다>로 내달린 흥행보증수표 차승원. 5타수 5안타라서 여섯 번째 타석 <혈의 누>가 부담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5타수 5홈런이면 부담이겠지. 하지만 사실 1루타, 2루타 혹은 에러로 출루한 경우도 있었다. 흥행은 수치가 전부지만, 내 기준에서 보면 흥행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고 답한다. 질문을 할 때마다 이거냐 저거냐라고 단순하게 물으면 여지없이 날카롭게 되받아온다. 정확히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는 묻는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씩 웃는다. 화법이나 행동거지에서는 여우라면 이런 여우가 없고, 영화를 대하거나 자신을 평가하는 엄격함과 우직함으로는 곰도 이런 곰이 없다. 베니치오 델 토로를 좋아한다는 이 남자는 그가 좋아하는 델 토로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타입이다. “약한 역을 해도 약하게 보이기보다는 약한 척하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다.

<혈의 누>의 이원규는 <세기말>의 문상우를 떠올리게 한다. 먹물들을 씹고 찢어발기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지만, 결국은 그 먹물 속으로 편입되기 위해 몸부림치던 속물이자 먹물 문상우. 차승원은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인물이라는 점은 비슷하다. 둘 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 방식으로 살겠다는 인간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혈의 누>의 원규가 사건현장인 동화도에 도착해서 겪는 당혹감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베트남 나트랑에 도착한 윌라드(마틴 신)의 내레이션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곳에 당도했다”라는 윌라드의 언어는 이원규가 끝내 넘어서지 못하는 자기 논리를 닮았다. “원규가 보여주는 합리는 자기합리에 가깝다. 더 나아가서 책이나 교육을 통해 배운 합리성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가 하는 질문도 가능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성적인 논리가 무너지고 사건이 잘 안 풀리자, 원규는 원초적으로 변해간다. 자신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우기고 가르치려 든다”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은 그의 영화에 대한 태도를 엿보게 한다. 관객이 원하는 것을 포착하고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차승원은 한국 상업영화의 히든카드로 부상했다.

“배우의 덕목 중 하나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생각할 때 그것에 언제나 마이너를 붙이는 거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A라고 생각하면 자신은 사실 A 마이너이다”라고 말하기에 스스로의 배우로서의 위치를 묻자 “이 정도로는 멀었다. 어림도 없다”라고 고개를 내젓는다. 코미디영화의 카리스마라는 사람들의 세평을 내밀면, “코미디 잘하는 사람들이 별처럼 많다. 그냥 하는 소리”라며 웃는다. 그는 대부분 자신을 “정확하게, 물렁물렁하지 않게” 평가하고 괴롭힌다. 반대로 사람들을 대하는 그는 쾌활함 그 자체다. <귀신이 산다>의 거제도 현장에서 발견한 차승원은 스탭들에게 대우받는 연기자가 아니라 막내들과 농담하고 장난치며 어려운 일을 상의하는 ‘형’이었다. 영웅본색의 소마(주윤발)을 컨셉으로 한 10주년 표지를 찍으면서도 연신 장난을 친다. 위조지폐 뭉치를 내밀며 “이거 다 쓸 때까지 찍어야지”라고 너스레를 떠는 그의 농담에 긴장된 분위기는 바람처럼 사라진다. 현실의 차승원이 스크린의 차승원보다 더 유머러스한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코미디영화 효자론으로 상업영화의 긍정성을 옹호했던 차승원이 이번에는 한국영화 좌판론을 끄집어냈다. “영화는 자기 혼자 만들어서 좌판 깔고 혼자 장사하는 일이 아니다. 매일 매상만 올리면 되는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과 함께 꾸준히 잘해야 한다.” 결국 배우의 직업의식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일정한 개런티를 받았다면 캐스팅, 제작, 홍보, 상영에까지 철저하게 직업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만든 뒤에 자기만 좋아한다고 만족하는 건 굉장히 이기적인 욕심이다.” 그가 말하는 대중문화의 배우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다. “대중이 뭘 생각하는지 읽어야 한다. 그러나 그걸 따라가서는 안 된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그걸 자기 방식으로 소화해야만 박수받을 수 있다.” 관객이 원하는 것을 수용하지만, 표현하는 것은 자기 식으로. 이것이 차승원이 말하는 영화배우의 생존율이다. 대중의 눈높이와 기호에는 끝없이 귀를 기울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것의 그의 철학이다.

승승장구하는 김상진 감독과의 직업을 이어가지 않는 것도 동일한 이유. “이미 익숙해진 것에 대해 불편해하는 관객이 많다. 이미 세 편을 통해 콤비의 조합은 다 보여줬다. 서로 다시 새로운 것을 쌓아 만나야 한다”라는 말에 성공 가능성이 높은 작업을 포기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반문하자, “쉬운 길은 무엇이든 문제가 있다. 다른 말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쉬운 것”이라고 응수한다. 덧붙여 “잘하는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후에는 코미디를 하더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하지는 않는다”라며 정확히 선을 긋는다.

코미디에서 승승장구하던 차승원이 <혈의 누>라는 변화의 길을 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극의 진부함이 없고 스릴러라는 장르의 진취적인 성격이 그와 맞물린 묘한 느낌 때문”이라고. 이성과 합리로 똘똘 뭉친 차가운 수사관, 본능과 광기 그리고 원죄에서 몸부림치는 햄릿이 군관 이원규에게 겹쳐진다. 그리고 그 모습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안에 있는 쌀알들이 얼마나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발버둥을 치겠는가”라고 삶의 아이러니를 되묻는 차승원과 몇년을 입어온 양복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의 다음 라운드는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 스타와 배우 사이를 끝없이 날아다니면서도 “아직은 턱도 없다”고 엄하게 자기를 다스리는 그는 이제 또 다른 도전을 위해 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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