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총없이 전쟁에 나서는 군인없고, 필기도구 없이 취재에 나서는 기자는 본 적이 없다. 카메라 없이 촬영에 나서는 영화제작팀 역시 상상불가다. 아무리 유능한 감독이고 잘난 배우라도 카메라와 조명기 없이 영화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촬영장비들은 현장의 진정한 주인공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 영화의 탄생이나 새로운 영화미학의 발전 역시, 장비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기술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던가. 이는 90년대 후반 이루어진 한국영화의 눈부신 발전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지금은 예사로 사용하는 대부분의 촬영장비들은 90년대에 걸쳐 일반화됐다. 웬만큼 새로운 장비들은 영화진흥위원회(당시 영화진흥공사)에서만 구경할 수 있던 10여년 전, 좀더 좋은 장비를 챙겨가기 위해 아침부터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싸울 정도로 열을 올렸던 스탭들. 그들이 부족한 형편에도 필요한 장비를 하나씩 사모으고, 비싼 외국장비를 국내 상황에 맞게 재개발한 덕분이다. 이를 통해 우리 영화의 발전을 일궈낸 사람들이 가족처럼 아끼는 장비의 극히 일부를 소개한다. 1천원짜리 청테이프부터 억대에 달하는 카메라까지 가격대나 용도도 천차만별이고, 그렇다고 엄청난 첨단기술을 보유한 것도 아닌 장비들. 그러나 이것들이 있어 가능해진 장면들을 생각하며 찬찬히 뜯어보면, 하나같이 고마운 존재들이다.
1. 카메라 관련 장비
들어는 봤나? 도기캠 보디마운트
a. 모니터: 촬영감독이 뷰파인더로 보는 상(像)을 보여준다. 녹화도 가능하다. 촬영장에 모니터가 등장한 것 역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며, 모든 감독들이 모니터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b. 팔로포커스: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작동시키는 동안 촬영부 퍼스트가 이것을 돌려 포커스를 이동시킨다. 촬영전 리허설 때 퍼스트는 포커스 이동 경로를 미리 확인하고, 펜이나 테이프로 표시해놓고 반복해서 연습한다.
c. 필터: 카메라에 들어오는 광선의 색깔을 바꾸거나, 화면의 밝기를 바꾸거나, 유리의 심한 반사를 방지하는 등 다양한 효과를 위해 필터를 쓴다. 카메라에서 필터를 장착하는 부분을 매트박스라고 부른다.
d. 트라이포드: 앵글에 따라 높이 조절이 가능하다.
e. 헤드
f. 배터리
상업영화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카메라들은 15개 내외의 박스에서 나온 것들을 조립해서 만들어진다. 나사 하나라도 없으면 낭패이기에 촬영부들은 언제나 모든 박스 안에 장비들이 제대로 들어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야 한다. 카메라를 실수로 떨어뜨리거나 쓰러뜨린 스탭은, 영화계에서 떠날 각오를 해야 했던 것이 한때의 관행이었다. 장비 대여시 보험가입절차를 거치는 요즘엔 그처럼 살벌하진 않다.
촬영되지 않은 생필름과 보디를 거쳐 촬영된 필름이 감기는 부분을 매거진①이라고 부른다. 총알을 장전하는 탄창을 뜻하는 용어가 카메라에 그대로 적용됐다. 일반적으로 5분 내외의 촬영분량이 담긴다. 현상료까지 합해봐야 30만원 정도에 불과한 필름이라고? 그러나 그 5분을 찍기 위해 투여된 물량에 따라 매거진이 담고 있는 필름의 가치는 몇 억원에 해당할 수도 있다. 렌즈, 보디와 함께 촬영부가 숙소 안까지 들고 간다는 ‘3대 귀중품’ 중 하나. 여기에 들어가는 필름에 빛이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밀폐된 주머니에 매거진을 넣고 필름을 장전해야 한다. 현장분위기가 엄하다 못해 험악했던 몇년 전만 하더라도 필름을 갈아끼우는 촬영부는 정신집중을 위해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평균 몇 천만원에 달하는 렌즈② 네다섯개가 기본 세트를 이룬다. 장비가 귀한 시절, 촬영부 막내는 렌즈 박스에 손도 못 댔다. 처음으로 렌즈를 만지면서, 손을 덜덜 떨었던 것은 촬영부라면 누구나 가졌던 경험.
VP렌즈: 미세한 줌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카메라를 세팅한 뒤 경미하게 사이즈를 조절할 때 쓴다. 달리는 차 안의 배우를 찍는 레커차 촬영처럼 카메라가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순간이나, 몇 미터에 달하는 레일을 깔고 몇 시간에 걸쳐 준비한 뒤 막상 프레임을 살펴봤는데 다소 사이즈가 불만스러울 때, 유난히 편리하게 느껴진다.
이노비전③: 사람의 눈을 크게 클로즈업했다가도 카메라가 조금만 뒤로 빠지면 바스트숏 정도까지 잡을 수 있다. 열쇠구멍에 눈을 대고 있다가 뒤로 물러나는 인물을 보여주거나, 하품하는 입에서 시작해서 인물 전체를 보여줄 때처럼 좁은 구멍에서 시작해 풀숏으로 이어질 때 제격이다. “135mm 정도 되는 망원렌즈로 이런 장면을 찍으려면 하루종일 달리 아웃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모 스탭의 과장 섞인 증언. 90년대 중반부터 현장에서 사용됐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어떻게 이런 장면을 찍었을까.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열쇠구멍을 제작하거나, 하품하는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거나 하는 식의 무식한 방법이 고작이었다. 여기에서 업그레이드된 것이 <그때 그 사람들>의 김 부장이 등장하는 첫 장면(그의 눈을 잡던 카메라가 360도 회전하면서 뒤로 빠지면 진료실 안 전체가 보인다)에 쓰인 레볼루션 렌즈. 렌즈를 돌리면 카메라 자체를 회전시킨 것과 같은 효과를 줄 수 있다.
공사현장에서 쓰이는 기중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촬영감독이 카메라와 함께 탑승하는 것이 크레인④이다. 이후 산악지대나 좁은 장소처럼 크레인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 지미집⑤인데, 전문기사가 리모컨으로 카메라의 움직임을 조절한다. 90년대 초반 국내에 소개되어 지금은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메라를 움직이는 반경이 제한된 크레인과 달리 직부감과 360도 회전이 가능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두밀령 전투장면에서는 참호를 따라 폭격하는 전투기의 시점을 표현하기도. 경사진 땅을 파서 수평을 잡고, 8m 정도의 참호를 따라 설치된 폭약이 터지는 속도에 맞추어 카메라를 움직였던 장면인데, 한번 터진 폭약을 재설치하는 데 2시간씩 소요되는 상황에서 중간에 장마까지 겹치는 바람에 1주일 내내 찍어야 했다.
육중한 트라이포드로부터 카메라를 떼어내면서도 흔들림 없는 화면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스테디캠⑥. 국내에서는 90년대부터 간간이 사용되다가 이제는 영화학교 졸업작품에서도 등장할 정도가 됐다. 지미집과 마찬가지로 전문기사가 카메라를 작동시킨다는 점 때문에 초반에는 촬영감독과 스테디캠 기사 사이에 팽팽한 견제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제는 촬영감독이 “지미집이나 스테디캠 쓰면 좋죠. 쉴 수 있는데”라며 농담삼아 말할 정도로 현장에서의 역할분담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베스트(조끼)를 몸에 착용하고, 암(arm)을 연결한 뒤 그 위에 일반 카메라를 장착하게 되면, 평균 20, 30kg에 달하는 무게를 지탱해야 하기 때문에 스테디캠 기사에게 허리병은 직업병. 육중한 장비를 몸에 두르고 전쟁신을 찍다보면, 폭탄의 파편에 상처를 입고 장애물에 걸려서 넘어져 비상사태는 예사로 넘겨야 한다. 가장 힘든 장면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닭이나 소 같은 동물을 따라가야 하는 장면. 카메라를 촬영자와 합체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배우의 몸에 카메라를 부착시키는 도기캠 보디마운트⑦도 있다. 영화 속 인물의 시점숏을 주로 표현하는 스테디캠과 달리 배우의 얼굴을 바로 찍는 경우가 대부분. 흔히 볼 수 없는 낯선 느낌을 주는 화면을 만들어내며, 짧은 순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쓰리>에서 김혜수가 이용했고, <슈퍼스타 감사용>의 감사용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첫 등판하는 장면에서,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가 조폭들을 상대로 처절한 격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쓰였다. 이병헌은 이 불편한 장비를 몸에 붙이고 험한 액션신 전체를 연기했는데, 아무래도 위험한 것이 사실. 그러나 “김혜수도 했는데 이병헌이 못하겠냐”는 주위의 부추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갖은 고생 끝에 어마어마한 분량을 촬영했지만, 불행히도(?) 실제 영화에선 몇초밖에 쓰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