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죽음은 신의 죽음’이라는 엘리 위젤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팔다리가 잘려나간 채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터키 국경을 떠돌면서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던지는 쿠르드족 어린이를 보노라면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당장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 전쟁을 일으킨 사악한 어른들의 목을 조르고 싶다. 영화가 끝날 즈음이면 아이들의 국적은 관객의 국적이 되고, 아이들이 쓰는 쿠르드어는 관객의 언어가 된다. 아니, 정녕 그렇게 부담스럽고 진지한 영화란 말입니까?
아니다. 이 영화는 지하철 앵벌이 소년소녀를 이라크로 데려가 찍은 최루성 영화가 아니다. 여러 가지 독법으로 즐길 수 있는 열린 작품이다. 물론 바닥엔 영화 내내 아이들의 발목을 적시는 더러운 진창 같은 현실이 있지만 말이다. 첫 번째 독법은 소년이 소녀를 사랑한다는 기둥 줄거리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다. 무대는 2003년 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한 이라크 국경지대 쿠르디스탄. 전쟁이 벌어진다는 흉흉한 소식은 암울한 공기가 되어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른다. 텐트에서 텐트로 이어지는 피난민의 귀는 쫑긋하다. 전쟁이 언제 일어나느냐, 그래서 언제 어디로 피난을 가야 하느냐는 생사를 가를 정도로 요긴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위성(소란 에브라힘. 위성 접시 안테나를 만질 줄 알아서 붙은 별명)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위성은 동네 아이를 이끌고 지뢰 제거, 탄피 수거 사업으로 돈을 벌고 어른들과 흥정도 하는 웃자란 소년이다. 삶을 헤쳐나가는 게 제1과제였던 그에게 낯선 선물이 찾아온다. 타지에서 흘러온, 두팔을 잃은 헹고(히레쉬 페이살 라흐만)의 여동생 아그린(아바스 라티프)이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탓에 신비스러운 소녀다.
위성은 처음엔 헹고를 팔병신이라 부르며 헹고네 가족과 신경전을 벌이더니, 나중엔 헹고의 예언을 귀기울여 듣게 되고, 아그린과 아이 리가(이라크군에 강간당한 뒤 낳았다)의 방독면까지 챙겨준다. 자신의 자전거로(난민촌에선 벤츠급이다) 남매가 쓸 물을 길러주며, 아그린의 아이 리가를 돌봐주는 모습은 웃기면서도 가슴 저리다.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가족들까지 챙기는 넓은 오지랖이 웃음을 자아내고, 다정다감한 마음이 마음을 찡하게 한다. 자전거로 물양동이를 싣고 위성과 아그린이 함께 걷는 장면은 서정적인 어조로 첫사랑의 감회를 건드린다. 화면 오른쪽에서 새떼가 포르르 날아올라, 키 작은 연인들의 어깨 위로 사라지는 장면은 어둑한 쿠르드족의 하늘을 잠깐이나마 빛낸다.
사실, 키 작은 연인의 서정시만으로 읽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현실은 지뢰투성이다. 자살과 유아 살해 충동에 시달리는 아그리을 지켜보는 일은 고문에 가깝다. 팔없는 품으로 조카를 돌보는 헹고의 움직임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고바디 감독은 곳곳에 상징을 심어놓아 이 우울한 현실을 날아오를 방법을 근심한다. 이것이 두 번째 독법이다. 눈도 잘 보이지 않는 리가는 왜 거북이를 꼭 물에 넣어주려고 하는가. 과연 거북이는 날아오를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위성의 동네 후배인 쉬르크가 위성에게 건넨 금붕어는 무얼 뜻하는 것일까. 감독은 행간에 비의를 숨겨두어 관객이 해답을 찾게 한다. 그리고 헹고의 예언 능력과 미국 미디어의 능력을 대비시키며 해답의 방향을 암시한다. 언덕을 빼곡하게 메웠지만 전파 하나 못 잡는 불모의 안테나들, 위성 안테나에 잡히지만 알아들을 수도 없는 폭스뉴스는, 미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다고 해서 쿠르드족에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라는 암시가 아닐까.
그래서 감독이 권하는 독법은 다음이 아닐까 여기게 된다. 영화는 <아무도 모른다>처럼, 가파른 현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어린이들의 움직임을 활기차게 잡아낸다. 위성은 어른들로부터 일자리를 얻어내 아이들에게 분배하고, 아이들은 꾀바르다 못해 사려깊기까지 한 골목대장 위성의 뜻에 따라 억척스레 일한다. 노동의 피로가 이들의 소년기를 단축시키지만, 소년다운 친구 사이의 즐거움까지 가로채지는 못한다. 지뢰밭 사이로 들어가게 된 리가를 구하는 장면은 이들이 서로에게 전부이자, 살아갈 힘을 주는 열정 자체임을 말한다. 에른스트 블로흐나 아도르노가 보았으면 놀랄 법한 영화다. 이제는 사라져 없는 줄로 알았던 견고한 우정의 공동체가 여기 있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희망의 근거이며, 거북이가 날 수 있다고 말하는 예언의 근거가 아닌가.
물도 잘 빠지지 않는 진흙 구덩이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은, 극장 문을 나서면 멍처럼 욱신거리며 잊을 수 없는 잔상을 남긴다. 그러나 시인 황지우스러운 말투를 쓰는 게 잠시 허락된다면,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비극을 웃어넘길 줄 아는 바로 이 아이들이야말로 진흙탕에서 피어난 우주 연꽃 아녀?
지뢰밭, 바흐만 고바디의 무대
쿠르드족의 암울한 현실을 드러내는 장치
그 흔한 폭음이나 핏방울, 파편 자국 하나 없이도 바흐만 고바디는 비극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고바디가 만든 비극의 무대장치는 바로 지뢰다. 그러나 그것이 터지거나 살점이 날아다니는 적은 한번도 없다. 전편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서 아윱 남매의 아버지가 지뢰로 돌아가는 장면은 이웃들의 비탄 섞인 울음소리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지뢰는 쿠르드족의 암울한 현실을 현실적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이번엔 더 나아가 지뢰를 통해 반전, 반미, 반부시적 태도를 보여준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쿠르디스탄에 묻힌 지뢰에 관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얼마나 오래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머니와 할머니는 지뢰 피해자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지뢰가 계속 심어지는 한 쿠르디스탄은 여전히 위험지대이며, 미국과 유럽의 무기 제조업자들은 사담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에게 지뢰를 다시 팔곤 한다. 매 순간, 가난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지뢰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불구자가 되고 있다. 요즘에는 갓 태어난 신생아를 ‘지뢰’라고 부르는 가족이 있을 정도다.”
두팔이 없는 헹고, 다리 하나가 없는 파쇼(사담 호세인 페이살)를 비롯해 주인공들은 실제 지뢰의 피해자이다. 지뢰가 암시적인 위협 수준으로 나왔던 <취한 말…>과 달리 <거북이…>에선 지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뢰는 높은 환금성을 지닌 거래수단이자, 어린이들의 재산이며, 아이를 실제 사지로 몰아넣는 플롯상의 중요한 장치로 나온다. <거북이…>의 어린이들은 미국제 ‘1급 지뢰’를 제거해 시장에 내다팔고 그 돈으로 무기를 사서 스스로를 지킨다. 미국이 악의적으로 판 지뢰를, 쿠르드의 어린이들은 지혜롭게 자위 수단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영화를 찍은 뒤 헹고와 파쇼는 학교에 입학했다. 위성은 학교를 마치고 영화제작을 준비 중이며 아그린은 쿠르드 방송사에 취직, 어린이 프로그램 호스트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