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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엿이나 드셔!
2001-07-11

상상의 힘에 경배를 보내는 <파나마 오브 테일러>

● 존 르 카레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존 부어맨의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초기의 보도들이 떠들어댄 것과 달리, 그렇게 엉터리없는 물건만은 아니다. 제작사 콜럼비아는 시사회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는 소문을 흘리는가 하면 개봉날짜를 변경하는 등 실패작을 예고하는 전통적 수순을 착착 밟았지만, 막상 영화는 지난 시즌에 스튜디오들이 내놓은 야심작들보다도 한수 윗길이다. 연기는 매끄럽고 도덕관은 시대에 맞게 회색이며 태도는 거의 환상적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지난 2월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세계 첫 시사를 가졌을 때 프랑스의 베테랑 작가주의 평론가들로부터 적지 않은 환대를 받았으며, 미국땅의 부어맨 팬들도 이에 못지않게 환호할 것이 분명하다. 제작사는 이 영화가 코미디로 뽑혀나올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르 카레의 스릴러 자체가 일종의 스파이소설 패러디인데도 말이다. 희화화 정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존 부어맨은 아예 한술 더 떠 런던 정보당국이 파나마로 쫓아보낸 못돼먹고 날강도 같고 썩어빠진 비밀요원 역에 다름 아닌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을 캐스팅했다.

제임스 본드 빈정거리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앤디가 열대지방에 맞는 양복을 맞춘다는 핑계로 주인공 해리 펜들(제프리 러시)을 처음 만났을 때, 유명한 이름 주워섬기기 좋아하는 이 양복재단사는 태연스럽게 “숀 코너리씨가 찍은 물건”임을 상기시킨다. 물론 해리야말로 앤디가 찍은 물건이다. 스파이 앤디는 새빌거리(영국의 유명한 양복점 거리)에서 날아와서, 파나마 지도층의 옷을 만들어주는 이 발넓은 양복쟁이가 정보원감으로는 딱이라는 추리를 한 것이다. 게다가 해리 스스로도 숨겨야 할 과거의 구린 비밀이 있고 말이다. 앤디는 해리를 협박해서 정보를 털어놓게 만든다. “스파이짓이란 음침하고 외로운 작업이지. 구강성교처럼 말이야.” 앤디가 내뱉은 이 말은 옛날 영화를 기대하고 모여든 캘리포니아 시사회 관객을 기분 상하게 만든 몇몇 대사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전혀 목석 같지만은 않은 브로스넌은 유들유들하고 악마적인 스파이를 연기하면서, 한가롭게 대사관 직원(캐서린 매코맥)을 꼬시는가 하면, 그 와중에도 해리의 돈많은 미국인 마누라(제이미 리 커티스)에게 음탕한 눈길을 던진다. 한편 늘 허둥거리고 수다스러운 해리는 교활하기는 하지만 구석구석 착한 인물이다. 가정에 헌신적이며 친구들에게 충성스럽고 약점을 지닌 낙오자라는 점에서, 20세기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젊은 유대인의 최신 변종이다.

부어맨의 참신한 아이디어 중 하나는, 해리가 그의 정신적 지주 미키 아저씨(해럴드 핀터가 카메오 출연한다)와 나누는 내면적 대화들을 형상화한 것. 해리의 이 ‘양심’은 예외없이 속이고 감추라고 충고한다. 문제의 핵심은 해리가 날조의 천재라는 거다. 그의 주특기는 아예 연출까지 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현실을 재단하고 가봉하는 것. 머지않아 그는 앤디에게 환상적으로 각색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몇몇 급진적 학생운동권 출신 친구들을 등장시켜 현 정권을 전복하려는 ‘무언의 작전’을 날조해내는 것이다.

이 ‘무언의 작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 앤디에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었을까? 파나마에 운하를 반환하는 데 따른 국제적 파장에 노심초사하는 런던의 상관들에게 날이 갈수록 기괴해지는 이 시나리오가 먹혀드는 한 아니올시다, 일 것이다. 이 미지의 작전에는 지원이 필요하다. 돈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인다. (부시 일가의 파나마 커넥션이 재치있게 언급된다.) 이거야말로 제국의 새로운 옷이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상상력의 힘에 대한 송가다. 그러나 해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아내를 이용하라는 협박에 몰리면서 농담은 치명적인 국면으로 반전된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피터 위어의 <가장 위험한 해> 이후, 제3세계의 부패에 편승해 한몫 챙기려고 뛰어든 영미인의 사례를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요즘 그 대가는 그다지 크지 않다. 르 카레의 원작과 달리 부어맨은 비교적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반전이 너무 늦은데다 어울리지도 않는다. 부어맨 스스로도 재단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도 솔기가 몇 군데 튿어진 채로 영화를 세상에 내보내고 말았다.<빌리지 보이스> 2001,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