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배우, 황정민 [2]

황정민은 럭비공 같은 배우라고요?

최동훈 | 저는 좋은 배우는 냉정하고 잔인한 역과 굉장히 인간적인 역의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인 것 같아요. 위대한 배우는 그걸 다 보여줬고. 황정민씨는 그게 있는 거예요. 인간적인 면도 있고 정말 잔혹한 면도 있고.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전자를, <달콤한 인생>이 후자를 보여줬죠. 근데 아주 잔혹한 역을 할 때는 겉포장에서 착한 사람 같은 게 있고, 아주 착한 사람 역을 할 때는 성질날 때 팍 튀어나오는 게 있어요. 그래서 그 인물들이 아주 잔혹하거나 아주 착한 사람이 아닌, 뭔가 약간 겉과 속이 있는 인물이 돼요.

황정민 | 기본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눈은 태어난 그것대로 속이지 못하는데, 그걸 바탕으로 역할에 대해 자꾸 고민하고 고민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조금씩 변해가는 게 있어요. 자기 최면 같아요.

최동훈 | 자기 최면이 있어요?

황정민 | 네. 평상시에는 그런 거 못 느끼는데 일할 때만큼은 좀. 성격인데 남한테 피해 안 주려고 하는 거. 이왕 영화를 한다고 했으면 그것에 맞게끔 100% 맞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죠. 아직도 헤매고 있는 중이에요.

최동훈 | 몇 사람에게 황정민씨에 대해 물었는데 그중에 제일 재밌었던 말은 다음에 어떤 역을 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예를 들면 존 웨인은 한번도 변하지 않고 총잡이 역할만 하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이 좋아해요. 반대로 에드 해리스, 존 트래볼타, 앤서니 퀸 같은 배우는 캐릭터에 따라 바뀌죠.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관객에게 어필해야겠다라는 전략이 있나요?

황정민 | 전혀 없어요. 그냥 내 이미지는 내 이미지일 뿐이지.

최동훈 | 순간순간 바뀔 수 있다고?

황정민 | 스스로의 마음의 차이인 것 같아요.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니까. 황정민이 지닌 본래의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두세 작품 하면 끝이라고 봐요. 그렇다면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뭔가. 역할의 진정성이라고 봐요. 그걸 믿어요. 나와 역할과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이해하려고 고민하면 변하는 것 같아요. 오만이지만.

최동훈 | 오만은 좋은 것 같아요. 예전에 박찬욱 감독님이 그랬어요. 우리는 오만해져야 한다, 그래야 이 힘든 세상을 버틸 수 있다, 물론 남한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오만은 감독에게도 배우에게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배우를 경험하고 싶어서 몇번 해봤는데 그때마다 굉장한 불안감을 느껴요. 그 불안감이 뭔가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저 인간들이 내가 연기 못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있고. 그래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걸 타박하죠. 아니 여기 왜 이렇게 땅이 질어, 하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거죠.

감독이 얘기하는 걸 120% 이해하려고 해요

황정민 |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근데 저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연기는 느껴요. 연기를 하려고 하면 그 때부터 못해요.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그 상황에 있으면 그냥 스스로를 믿으면 돼요.

최동훈 | 아까 얘기한 거랑 연결이 되네요. 열려 있는 디렉팅을 주면 충분히 동화해서 갈 수 있는.

황정민 | 배우들이 얼마나 많이 그 역에 대해 고민하겠어요. 현장에 나가서 주변의 공기며 땅이며 나무 한 그루까지 자연스럽게 매치가 돼요. 자신을 믿고 느끼면 돼요. 하면 안 돼요. 임상수 감독에게 많이 배운 건데요. 연극했던 배우들의 문제는 마악∼ 연기를 하려고 해요. 하고 나면 내가 연기를 좀 했어,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마스터베이션이에요. 그게 관객에게 부담일 수 있거든요. 배우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관객을 위해서 존재하는 건데. 물론 모든 연극배우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전 그랬어요. 알면서도 잘 제어가 안 돼요.

최동훈 | 묻어나는 연기 있잖아요. <바람난 가족>에서 혼자 있는 장면은 별다른 동작이 없는데도 그 인물에게 집중할 수 있거든요.

황정민 | 그런 부분을 느낀 거예요. 만약에 내가 좀더 생각했다면 뭔가 연기를 하려고 했을 텐데, 잔동작이든 뭐든. 그런데 감독님은 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그러면 배우들은 미치는 거거든요. 이게 연기 맞나 싶어서. 영화를 보고 나니까 안 해도 더 많은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안 거죠. 그래서 <바람난 가족>을 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때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을 보고 그래 저렇게 연기 한번 해보자 싶었어요. 난니 모레티는 가만히 서 있어요, 아들 죽었는데도 멀뚱멀뚱.

최동훈 | 저의 경우는 어떨 때 그런 불안감이 들어요. 내가 만드는 영화가 평평하게 가서 너무 평범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그걸 이기면 평범해도 빛을 발하는 건데. 연기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떻게 불안감을 해소하죠?

황정민 | 자꾸 반복하지만 그 역할에 대한 진정성인 것 같아요.

최동훈 | <로드무비> 이야기를 하면, 저 사람이 저 인물을 잡고 가는 시각, 그걸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무얼까 싶었어요.

황정민 | <로드무비>도 그렇고 잘 모르겠어요. 뿌옇다가 차츰씩 걷히는데, <로드무비>는 계속 멍멍하게 갔던 것 같아요. 그때는 영화에 대해 잘 몰랐고, 마초적인 게이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 하나하나의 행동이 거짓말이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어요.

최동훈 | 혹시 자신이 마초라고 생각하나요?

황정민 | 전혀 그렇지 않죠.

최동훈 | <YMCA야구단>의 김현석 감독은 무색무취의 배우라고 하더라구요.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애초에 어떤 이미지가 없는데 원하면 나온다고.

황정민 | 그 역할을 내가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역할을 이렇게저렇게 하는 건 감독이거든요. 제3자의 역할이 늘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후배들에게 항상 그래요. 네 생각만이 다가 아니다라고. 네가 네 자신을 못 보는데, 제3자가 너를 바라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그래서 전 감독님이 얘기하는 걸 120% 이해하려고 하지요.

최동훈 | <달콤한 인생>의 첫 촬영은 뭐였고, 어땠어요?

황정민 | 룸살롱에서 술마시다가 선우하고 마주치는 장면이었어요. 나중에 스카이라운지를 배경으로 다시 찍은 장면. 그런데 분장하고 의상 딱 입으니까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순간 피가 쫙쫙, 뭔가 근질근질거리는 느낌. 스탭도 멋있다고 하니까 더 움찔거리고.

최동훈 | 저는 그 장면 좋아하거든요. 문석(김뢰하)이 불러서 선우가 걸어와서 앉고, 백 사장은 이미 앉아 있는데 관객은 벌써부터 선우와 백 사장의 대결이라는 걸 알아요. 말은 문석이 더 많이 하지요. 그래도 관객은 말에 집중하지 않고 선우와 백 사장만 보죠. 근데 거기서 백 사장이 선우를 달래다가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래서 긴장감이 더 해요. 백 사장이 나서면 팽팽한 긴장감이 깨지죠. 그 신의 마무리는 백 사장이 위스키를 마시고 그 잔에다가 담배를 끄는 건데 무슨 말을 하진 않지만 백 사장이 선우에게 무슨 짓을 하겠군, 하고 알게 돼요. 그렇게 연출된 장면들이 좋고 관객도 배우들에게 더 집중되는 것 같아요.

황정민 | 끄는 게 대본에 있는 건 아니었고. 아니 저 자식 봐라라는 느낌의 애드리브죠. 어떨까요, 라고 감독님에게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하면 되니까.

최동훈 | 아이스링크에서 선우랑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꼬챙이로 아주 날렵하게 휙휙휙 찌르는데 그것도 대본에 없었을 것 같은데? 백 사장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었죠.

황정민 | 저는 백 사장의 등장보다도 죽을 때 임팩트 있게 죽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최동훈 | 죽을 때 한마디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정글쥬스>의 손창민은 ‘콧잔등이 가려워 긁어줘’ 하고 죽거든요. 재밌다 싶었는데 백 사장은 ‘아, 씨발’ 하고 죽는데, 내가 언젠가 이렇게 죽을 줄 알았어 하는 것처럼 들려서 재밌었어요.

황정민 | 원래는 뭐였냐면 왜 총을 쏘냐라는 거였어요. 우리나라 상황에선 총 맞아 죽기 힘드잖아요. 왜 총을 쏘냐 씨발, 하고 대사를 했는데 감독님이 너무 웃기다고 해서 앞부분을 뺐죠. 그런데 찌른 행동 뒤에 흥분해서 막 주절주절 떠드는 건 수월했는데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 아이스링크에서 선우를 딱 만났을 때였어요. 선우가 ‘웃어요, 웃어’ 하고 내가 했던 말을 다시 하는데 리액션들이 어려웠어요. 백 사장은 선우가 한수 위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다시 만났을 때 놀라면서 너무 놀라도 안 되고…. 그러니까 선우가 만만하면 얘가 얼마나 맞으려고 또 왔어 하는 투로 하면 되지만 이건 그것도 아니거든요.

최동훈 | <천군>은 곧 개봉할 거고 <너는 내 운명>은 어떤가요? 살도 많이 찌우고.

황정민 | 너무 좋아서 불안할 정도예요. 감독님이랑 도연이랑 너무너무 좋아요. 집사람에게 막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의 설렘 같은 거라고 얘기했을 정도예요. 상대배우가 이렇게 고맙고 상대배우가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에요.

최동훈 | 여기서 석중이라는 역에 대해 궁금한 건, 석중은 착한 사람인데 세상은 그를 착해지면 안 되게 하잖아요. 그래서 관객이 석중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보게 되고 그것으로 감정적 격정을 느끼게 되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한 복안이 있나요?

황정민 | 복안이라기보다 누구나 이런 사랑을 한번쯤 해봤으면 하는, 저런 남자 제발 한번 만나봤으면 하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사랑하면 유치해지잖아요. 자기는 모르지만. 워낙 우리나라 사랑영화들이 뭔가 장치를 많이 넣는데 그건 재미없다고 봐요. 사랑은 그냥 사랑이거든요.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정답이라고 보여주고 싶어요.

빨리 마흔이 넘었으면 좋겠어요

최동훈 | 영화작업이 갈수록 재밌죠?

황정민 | 재밌고 어렵고. 한편으론 나에 대해 굉장히 편해졌어요. 나를 들들 볶던 것들을 많이 정리하게 됐어요. 더 중요한 건 <마지막 늑대> 찍고 나서는 내가 배우를 안 하면 어때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거죠. 살날이 30년이 남았다면 10년 동안 초밥을 열심히 배워서 나머지 20년으로 잘살 수도 있는 거고. (웃음) 그래서 편해졌어요. 전 빨리 사십이 되고 싶었어요. 사십이 되면 연기 진짜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지난해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최동훈 | 연극판에서 ‘황정민은 날랐다’고 할 수 있는데 정말 웃겼거든요. 그때가 추운 시절이었죠?

황정민 | <바람난 가족> 할 때도 아르바이트 했어요.

최동훈 | 무슨?

황정민 | 시장에서 얼음.

최동훈 | 와, 죽인다. 얼음을 날랐어요?

황정민 | 냉동창고에서 생선박스에 얼음 채우는 거.

최동훈 | 선한 눈빛, 선한 이미지 때문에 배우로서 고민을 많이 하진 않았나요?

황정민 | 전혀. <바람난 가족>의 역할이 냉정하기는 하지만 그 눈이 어떻게 보면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인간적인 것 같은데 저 인간이 ‘저∼, 저’ 싶잖아요. 그런 게 그 역할을 더 풍성하게 했는데 그건 제 타고난 눈에서 나왔을 거라는, 뭐 그 정도. 선하긴 하겠지만 <달콤한 인생>에서 화를 내고 쳐다보고 하는데 절대 선하게 보이지는 않잖아요. 이번 역에서는 눈이 안 보여요. 하두 좋아서 웃느라고. (웃음)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