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생들 사이에 시화전이라는 게 유행한 때가 있었다. 직접 그린 수채화에 자작시를 적어넣은 시화 작품들을 전시하면, 친구들이 작품 옆에 꽃을 붙여 축하해주던 그때 그 시절이다. 이 책은 시화(詩畵)를 모은 건 아니지만, 헤르만 헤세가 그린 수채화 44점과 산문 및 시를 담고 있다. 화가로서의 헤세는 진작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불혹의 나이부터 세상을 떠난 85살 때까지 3천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헤세는 셰델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림 그리기는 놀라운 일입니다. 일찍이 아는 내게 눈이 있으며 나 자신이 이 지상에서 주의 깊은 산책자들 중 하나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변화가 나를 이 덧없는 의지의 세계에서 해방시켜줍니다.”
세부 묘사에 충실한 자연주의 경향, 색채에 집중하고 요약과 추상을 통해 자의식을 강하게 표현하는 표현주의 경향, 다분히 입체파적인 실험적 수채화에 이르기까지 40여년에 걸친 화가 헤세의 작품 세계는 다채롭다. 그러나 문학 작가의 과욕 정도로 치부됐던 모양이다. 1928년 에밀 놀데와 함께 연 전시회를 놓고 당시 언론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라도 이 시인 화가보다 열두배는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혹평을 가했다. 미술 평단은 헤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화가 헤세를 인정하지 않았고, 1980년대 이후에야 화가 헤세는 본격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헤세 전문 편집자로 유명한 폴커 미헬스는 화가 헤세의 작품 세계를 ‘꿈을 보기’라는 말로 요약한다. 헤세의 그림은 소실점이 그림 뒤가 아니라 그림 앞에, 즉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눈 속에 있다. 이런 독특한 원근법을 통해 헤세는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기보다는 자신의 소망을 그림에 투영해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려 했다는 것이다. 헤세가 1930년 여름 어느 여대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당신의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작은 그림 한점을 보냅니다. 이 그림은 며칠 전 내가 도화지에 그린 것입니다. 데생을 하고 채색화를 그리는 것은 내게 일종의 휴식입니다. 이 그림이 당신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자연의 무구함, 몇 가지 색채의 파동은 문제로 가득 찬 어려운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믿음과 자유를 언제라도 소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