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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군 투덜양] 졸음을 두려워 말지어다, <노스텔지아>

투덜양, 수면감상 끝에 타르코프스키를 발견하다

<노스텔지아>

분하고 원통하다. 나, 94년 <희생> 개봉 때 가장 먼저 극장에 달려갔던- 타르코프스키가 누구인지 몰랐다- 선진문화시민인 동시에 관객의 반이 가수면상태에 빠졌을 때 눈알을 반짝반짝 빛내던- 미스터리! - 심미안의 소유자임을 자랑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타르코프스키 관람 도전 2연패를 눈앞에 두고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이번에 재개봉한 <노스텔지아>의 시사회 중반까지만 해도 나는 타 선생님의 말씀을 가장 열심히 받아적는 모범생이었다고 자부한다. 참고로 당시 왼쪽에서는 영화에 3분가량 출연한 이후 스스로를 ‘영화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모 선배가 영화 시작 직후부터 규칙적인 수면호흡과 간헐적인 코골음으로 밤샘 음주 뒤의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고 오른쪽에서는 <씨네21>의 이아무개 기자가 선배의 리듬에 가끔씩 엇박자의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러나 두 시간을 넘기면서 너무 여유를 부렸던 게 화근이었다. 승리의 만족감에 빠져 나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풀어헤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럴수럴수 양쪽에서 네개의 눈알이 ‘니가 그렇지 뭐’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극장을 나온 뒤 “내가 존 건 1분도 안 된다”라고 누누이 주장했지만 <달콤한 인생>의 김영철 말마따나 백번 잘해도 한번 실수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자랑도 아닌 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건 졸음을 통해서 나는 타르코프스키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스크린에 펼쳐지는 푸르스름한 영상, 오래된 건물 앞에서 주인공 고르차코프가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까칠한 목소리로 ‘아’ 하고 단말마적인 비명을 질렀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더라면 그저 ‘드디어 끝나는구나’라는 승리의 흥분에만 들떠 있었을 게다. 오로지 고진감래를 마음에 새기고 꾸역꾸역 머릿속에 처넣은 두 시간보다 마지막 2∼3분은 훨씬 더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타르코프스키를 영상소설가나 영상산문가가 아닌 영상시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나는 온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본래 시란 처음부터 끝까지 책상 앞에서 통독하며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구절, 한 단어에 ‘필’이 꽂히는 것 아니겠는가. 구차하게 입만 나불댄다고 비난하지 말길. 타르코프스키도 말했다. “우리 러시아인은 단테를 안다고 말하고 이탈리아인은 푸슈킨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찌 내가 타르코프스키의 내면과 그 고독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졸다 깨 그가 보여주는 영상의 일부만이라도 보고 감동받는 것이야말로 평범한 관객이 타르코프스키를 받아들이는 최상의 자세가 아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졸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타르코프스키에 도전해보시길. 때로는 졸음도 작가와 교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희한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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