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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이게 적당하지 않을까?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머니가 버린 꼬마 넷이 남들 눈을 피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본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빨리 마음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아이들을 내팽개친 어머니를 비난하는 일일 것이다. 혼자 행복하자고 자식을 버리다니, 응당 누구나 분개할 만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적개심을 품기엔 너무 철없는 어머니가 아닌가. <아무도 모른다>에서 어머니는 꿈을 꾸는 여자일 뿐이다. 그녀는 너무 많이 버림받아서 버림받는 공포조차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크리스마스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지만 소년도 안다. 이번엔 정말 돌아오지 않을지 몰라. 그래도 울고불고 매달리지 않고 어머니를 떠나보낸다. 건조하게 연출된 이별장면에서 <아무도 모른다>가 비범한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 감독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자고 선동하지 않는다. 이번호에 실린 박은영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고발성 드라마로 비치거나, 떠나간 엄마를 가해자로, 남겨진 아이들을 피해자로 이분하는 위험을 피해가려 한 것이다”.

연출은 매순간 무언가를 선택하는 작업이다. <아무도 모른다>의 선택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현실이 보인다. 그래야만 비극의 방관자인 스스로를 책망하게 된다. 그래야만 영화를 만드는 자의 윤리가 지켜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걸 아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박은영 기자의 통찰은 그런 점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은 글이다.

다소 엉뚱한 얘기지만 <아무도 모른다>를 보면서 어린 시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 나이대 남자라면 대부분 그랬겠지만 어린 시절 나이키 운동화가 무척 갖고 싶었다. <내 나이키>라는 영화도 나왔지만, 꿈만 꾸면 나이키 운동화가 떠올랐던 그 시절, 참고 참다 입 밖에 내고 말았다. “나, 나이키 사줘.” 실직 상태인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하고 정말 오랫동안 후회를 했다. ‘못난 놈, 형편 어려운 거 알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속을 후벼팠다. 아마 그때 내 짝의 태도만 아니었다면 그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도 나이키 신은 아이들한테 “그런 신발, 줘도 안 갖는다”고 말하던 친구였다. 도시락도 못 싸오는 가난한 아이였지만 신체장애를 가진 친구의 가방을 들어주던 녀석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아이, 아무리 가난해도 주눅들지 않는 아이, 아무리 성가셔도 자기보다 불우한 친구를 돕는 아이. 그 녀석 덕분에 내 나이키는 평생 가슴에 남은 부끄러운 기억이 됐다.

<아무도 모른다>의 소년은 그 시절 내 짝 같았다. 제발 나쁜 짓을 하라고, 벌컥 화를 내라고, 징징 울기라도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길에 핀 잡초를 화분에 담았고 어린 동생들 세뱃돈을 챙겨줬다. 나는 오래된 내 나이키의 기억이 떠올라 낯이 뜨거웠다. 나만 그럴까? <아무도 모른다>는 어른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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