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만 832쪽, 해설을 포함하면 847쪽이 되는 엄청난 두께의 만화가 찾아왔다. 백화사전쯤 되는 위용을 자랑하니, 책꽂이의 한 자락을 차지해도 폼이 난다. 오랜 시간 작업해온 오세영의 단편이 한몫에 묶인 것이다. 예전에 출간된 책이 3권 분량이었으니, 그만큼이 오롯이 묶였다. 우선 한권에 여러 이야기를 한꺼번에 보는 마음은 흐뭇하다.
이번에 묶인 단편은 거의 해방 전후 소설가들(북한 작가 림종상의 <쇠찌르레기>만 1990년 작품이다)의 단편을 만화로 옮긴 것이어서, 전근대와 근대가 만나는 미묘한 풍광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일면이 흥미롭다. 보통 원작을 만화로 옮길 때, 이야기의 주요 맥락만 따라가고 세세한 묘사는 생략하게 마련이다. 특히 어른을 위한 책이 어린이 책으로 번안될 경우 때에 따라 개작에 가까운 변화가 있기도 한다. 이럴 경우 원작에서 느끼는 품격 대신 줄거리만 남고, 만화는 시각적 이미지로 앙상해진 줄거리를 보충한다.
그러나 오세영의 만화는 다르다. 놀랍게도, 소설과 만화가 거의 1대1로 대응된다.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는 칸 안에 살아 있다. 몇개의 긴 문장도 한칸에 멋들어지게 표현된다. 이건 마술과도 같다. 인물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적절하게 배분되는 해설도 그렇다. 그러다보니 다이제스트된 원작에 대한 서운함 대신 깊게 우려난 진국을 먹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맞다. 오세영의 단편은 인스턴트가 아니라 진국이다. 전근대와 근대를 겪으며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수많은 민초의 삶을 그린 소설들은 그대로 오세영에게 충실한 시나리오가 되어 만화로 되살아난다. 칸 안으로만 들어가면 우리는 근 100년의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는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소똥을 그릴 줄 아는 작가’가 아니라 그 이상, 잃어버린 조선의 풍광을 그릴 수 있는 작가라 칭찬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힘든 만화에 매달리고, 장인 정신으로 선 하나까지를 꼼꼼하게 감수하는 작가라 박수를 보낸다. 조선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조선의 풍광을 보고 싶다면, 바로 오세영의 만화를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