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은 1903년 일본 유학을 떠나는 중국 청년이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왜 일본이 불로장생의 영약이 있는 신산(神山)이었을까? 1895년 청일전쟁 패전으로 중국인들이 받은 충격은 쓰나미의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본을 배워 일본을 이기고 말리라!’ 이런 그들의 각오와 청나라를 회유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맞아떨어져 19세기 말부터 일본을 찾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중화사상에 젖어 있는 엘리트 청년들이 유학 생활에 연착륙했을 리 없다. 중국인을 업신여기는 태도에 분개해 자살한 유학생이 있는가 하면, 1903년 오사카 박람회에서 주최쪽이 인도, 중국, 조선, 자바, 오키나와, 아이누인의 풍속을 전시하려는 것을 알고 항의하여 계획을 철회시킨 유학생들도 있었다. 수치심, 자존심, 사명감, 애국심, 일본에 대한 경계심, 이런 것들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이었다.
문화적 차이는 또 어떤가? 침대없는 다다미방, 국 한 그릇, 밥 한 공기에 채소 반찬만 나오는 식사, 몸을 자주 씻는 목욕 문화까지 무엇 하나 맘에 드는 게 없었다. 기숙사 음식이 형편없다며 항의 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건조하고 먼지 많은 대륙에서 가래 뱉던 버릇을 다다미방에서 재현하고, 예쁜 일본 여학생의 몸에서 단무지 냄새가 나는 통에 환상이 깨졌다는 유학생마저 있었다.
새로운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주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일 중국 외교관들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노신, 곽말약, 장병린, 양창제(마오쩌둥의 스승이자 장인), 이대조, 주은래 등 많은 청년 유학생들이 개혁과 혁명 노선으로 기울었다. 여기에 손문, 강유위, 양계초 등 중국 근대 혁신세력의 집결지가 된 일본은 <수호지>의 양산박 바로 그곳이었다.
학문을 위한 유학이 아니었으니 강의가 아닌 개인적인 독서에서 더 많은 것을 얻었다. 노신의 경우 일본어 번역서를 통해 서양 주요 언어권 문학은 물론, 헝가리, 핀란드, 폴란드 등의 문학 작품까지 섭렵했다. 신해혁명 이전 1세대 유학생들에게는 일본을 따라잡아 부국강병을 이룬다는 꿈이 있었지만, 2세대 유학생들은 이미 제국주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좌절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신산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면서 미국 추월까지 외치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모습이 자꾸만 1세대 일본 유학생들의 모습과 겹치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