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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운다>와 세 남자 [2] - 류승완 감독 인터뷰
사진 이혜정이영진 김도훈 2005-03-24

“뻔하다고? 난 동의할 수 없다!”

지난 3월15일 저녁. 전쟁터를 방불케 했던 시사회와 기자간담회를 마친 류승완 감독은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다. 바로 전날 밤까지도 믹싱 작업을 했다는(그러고도 <밀리언 달러 베이비>까지 보았다는) 소년 같은 남자에게서 자신감이 엿보였다. “시사회를 앞당겨서 하는 것도 자신감이 있어서인가?” 시작부터 주먹을 날리자 “원래 예정되었던 일정”이라며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영화가 좀 길지 않냐는 반응들이 있다.

=애초에 2시간10분의 러닝타임을 예상했다. 두 주인공의 행적을 각각 쫓아가다가 어느 순간 라스트에 도달하는 영화다. 두 에피소드 모두를 섬세하게 보여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좀 긴 영화도 있고 그런거 아닌가. (웃음)

-촬영속도가 대단히 빨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촬영의 원칙은 무엇이었나.

=시간뿐만 아니라 제작비도 아꼈다. <아라한 장풍대작전> 때도 그랬지만. (웃음) 이번 영화는 테이크를 주야장천 많이 가고 싶지는 않았다. <주먹이 운다>를 찍으면서 세운 원칙이 캐릭터의 일관성에 얽매이지는 말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지금까지는 ‘류승완의 취향을 따라가는 패턴화된 연기’가 보인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고 인물들의 순간을 포착하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류승완이 원하는 것이 영화가 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주먹이 운다>에서 류승완의 위치는 대단치 않다. 나보다는 영화가 원하는 것을 먼저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류승완이 원하는 것과 영화가 원하는 것의 괴리란 구체적으로 무언가.

=지나치게 욕심이 커서 작품을 할 때마다 쉽게 지쳤다. 나는 원래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거장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냉정하게 돌아보면서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배우들과 사소한 디테일 때문에 충돌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였다. 이번에는 배우들을 많이 따랐다. 예를 들어, 마지막 결투에서는 원래 태식이 자기 애도 못 알아볼 만큼 지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민식은 태식에게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애를 부둥켜안는 것으로 바꾸기를 원했다. 배우의 감을 믿었다.

-태식과 상환의 파트가 교차하는 리듬감은 어떻게 궁리한 것인가.

=처음에는 그냥 1시간씩 나눠서 가다가 마지막 30분에 만나게 하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만들면 무조건 앞에 나오는 인물이 손해더라. 처음 1시간 나왔다가 1시간 동안 사라진 뒤 재등장하면 관객은 자연히 뒷인물에 더 감정을 몰입하게 된다. 이 영화는 관객이 어느 한쪽만 응원해서는 안 되는 구조다. 그래서 교차편집으로 갔다. 근데 둘을 엮어주는 사건도 없고. 왕가위나 타란티노처럼 한 공간에서 우연히 스쳐지나는 건 하기 싫었고. 그럼 베꼈다는 이야기만 듣게 될 테니까. (웃음) 그래서 크게 한덩어리로 시작해서 발단 부분에서는 두 사람을 관객에게 인지시키자. 그리고 1막은 큰 덩어리로 가자. 2막은 앞으로 둘이 부딪치겠구나라는 암시를 주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후반부로 가다보면 편집리듬도 점점 짧아진다.

-두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보고나니 두 인물 모두 같은 톤으로 가져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소더버그의 <트래픽>이 색감과 미술로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나눈 방식이다. 하지만 따라했다고 비난받을까봐 그러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에는 아주 물려버린 사람이라서. 그저 영화광으로서의 나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에서 어떻게든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미술이나 그런 건 촬영팀에 맡기고 나는 인물만 파고들었다. 이 영화가 이전의 어떤 류승완 영화와도 다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잘 보면 태식 부분은 점프컷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고 상환 부분은 안정된 컷 분할로 되어 있다. 최민식은 카메라 두대로 촬영해서 마스터 숏을 골라 썼고, 류승범은 숏별로 촬영했기 때문이다. 연기자들이 가장 편안하게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선택한 거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강태식이라는 인물보다는 상환에게 더 끌리는 게 있다.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어제 들었다. 그런 걸 듣는 게 되게 재미있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어떤가.

=태식에게는 큰 사건이 없다. 상환이 겪는 사건이 좀더 세긴 하다. 최민식이 아니었으면 균형을 맞추지 못했을 거다.

-배우들의 연기, 특히 류승범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끌어낸 것인가.

=최대한 요구를 안 했다. 그저 배우가 반응할 수 있는 판만 만들어줬다. 조명팀이나 음향팀이 섬세한 작업을 요하는 장면에서도 배우가 연기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조명도 약간 멀게 설치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배우가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예측을 할 수 없으니까 마이크 위치 잡기도 난감했고, 리허설도 없이 슛 들어갔다가 한번에 오케이되는 경우도 많아서 스탭들의 고충이 컸다.

-스타일적으로는 두 인물의 세계를 어떤 식으로 충돌시키려 했나.

=편집을 하다보니까 “이래서 사람들이 류승완 스타일이라고 하는구나” 싶은 게 있었다. 기본적인 숏 분할 방식이나 편집의 리듬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이론서의 이야기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를 해석하는 데야 도움이 되겠지만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정말 본질적인 것은 이야기와 인물들의 내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 아닌가. 나 역시 모든 숏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익스트림 롱숏으로 인물의 황폐한 내면을 그리자.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파도 같은 감정을 그리자’ 이런 건 아니다. 맥락을 잘 파악할 수 있게 길라잡이를 해주는 게 감독의 역할이 아닌가. 이번에는 오히려 설렁설렁 찍은 게 더 마음에 드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가족사를 설명하는 디테일들이 뻔하게 보이기도 한다.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다. 가족이라는 것에는 사실 일정한 패턴이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힐러리 스왱크의 가족이 <초록물고기>의 가족과 뭐가 다른가.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상투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다. 특히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그런 평가는 모욕적인 거다. 너무 많이 써서 지루하긴 하지만 그 가족은 ‘진심’이거든. 영화적으로 매력적인 것보다는 이 사람들의 진짜 삶을 그리는 게 더 중요했다.

-권투장면은 계획없이 실제로 찍었다고 들었다

=기본 트레이닝만 계속하고 복싱 합은 짜지 않았다. 예선전은 사실 디자인을 다 한 장면이다. 편집의 리듬이 정확하게 떨어져줘야 하기 때문에. 하지만 결승전은 합을 맞춰보니까 그런 게 잘 안 맞더라. 그래서 정두홍 무술감독이 경기의 흐름만 지정해주고 나머지는 배우들이 알아서 했다. 진짜 권투를 하는 게 느껴지지 않나? 신인왕전 장면은 걱정이 많았는데 의외로 쉽게 찍어버렸다. 신인왕전 장면은 모두 5일 만에 끝낸 거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라스트는 한달이나 걸렸는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봤나. 가족하고 권투가 나오는 게 비슷한데.

=그건 미국영화고 <주먹이 운다>는 한국영화니까 다르다. (웃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팬이기 때문에 재미있게 봤다. 그런데 지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주먹이 운다>를 못 만들 것이고, 지금의 나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의 내공이 쌓여야만 만들 수 있는 게 <밀리언 달러 베이비>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만들어야 하는 건 좀더 뜨거운 영화다. 동세대 영화들이 쿨하고 세련되게 가는 것과는 달리 내 영화들은 뜨겁게 간다. 그걸 이번에야 알았다. 과잉의 에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는 못 만든다. 그렇게 쿨한 영화를 만들기에 나란 사람은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차가워진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확신한다. 최소한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엔딩은 원래 의도대로 만든 것인가.

=두 남자의 환한 얼굴. 그걸 찍은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만든 의미가 있다. 그것 하나로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냈다고 생각했다.

-차기작은 뭔가.

=다시 장르 안으로 들어간다. 순도 100% 액션영화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영화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전통적 액션영화가 아니다. 차기작은 진짜 전통적인 액션영화다. (옆에 있던 PD가 ‘충청도 옹박’이라고 말하자) <옹박>보다는 80년대 홍금보가 연출했던 비장한 성룡 영화와 비슷하다. <용적심>이나 <비룡맹장> 같은 영화들 말이다. 주인공은 ‘후까시’를 잡아도 웃긴 충청도 애들이고 제목은 <짝패>다. 영화광으로서 나의 자의식이 가장 많이 반영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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