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의 콘트라스트
빛과 어둠은 ‘달콤한 인생’과 ‘쓰디쓴 나락’ 사이를 끊임없이 줄타기하는 선우의 모습을 드러낸다. 밝음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는 영화 곳곳에서 강렬하게 사용됐지만, 일정 수준을 넘지는 않았다. 되도록 지나친 과장을 피하려는 김지운 감독의 ‘우아르’ 전략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김지용 촬영감독은 “40년대 누아르의 콘트라스트가 하드한 느낌을 주는 건 당시 조명기술상 소프트 라이팅이 안 되고, 필름의 감도가 낮아 아주 강하게 조명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선우와 백 사장(황정민)이 맞대결을 펼치는 공간을 아이스링크로 삼은 것은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애초 촬영장소로 예정됐던 여의도공원이 추워지면서 볼품없어진 탓에 부득불 옮겨야 했는데, “별스럽고 기괴하며 유머러스한 면까지 갖추고 있는 황정민의 캐릭터를 고려했을 때 생뚱맞은 아이스링크가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김지운 감독은 설명한다. 정중앙 꼭대기에 강한 광량의 라이트 하나만을 켜놓자 아이스링크는 흑백과 명암의 대조가 극명하게 표현되는 공간으로 돌변한다(①). 그리고 이 아이스링크에 새빨간 피가 서서히 고여나가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선우의 보스 강 사장(김영철)의 공간도 빛과 어둠이 명확한 곳이다(②). 그 또한 운명의 손길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는 무언가에 갇혀 있는 듯한 미장센으로 드러난다.
선우는 알 수 없는 일로 낯선 창고에 감금돼 생명의 극한까지 몰린다. 이 장면은 인천의 한 수산물 창고에서 촬영됐다(③). “<LA 컨피덴셜>에서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는 공간 같은 느낌”을 생각했던 김지운 감독과 류성희 미술감독이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헌팅장소인 이곳은 별다른 효과 없이도 ‘천국과 지옥 사이의 어디쯤’의 느낌을 전달했다. 굉장히 넓고 황량하면서도 한국적인 냄새가 잘 나고, 일정하게 박혀 있는 조명이 무언가 강렬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김지용 촬영감독은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를 떨어뜨려 인물을 강렬하게 보이려 했다.
이 영화의 유일한 안식처는 희수의 집이다. 유난히 밝은 이곳은 희수의 캐릭터를 설명할 뿐 아니라 선우의 내면이 환해지는 것 또한 표현한다(④). 희수의 캐릭터를 등을 수집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이나, 강 사장이 등을 선물로 주는 것도 밝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색채
캐릭터 성격 드러내는 컬러 대비
색채는 <달콤한 인생>에서 명암과 함께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또 다른 요소다. 드라이하고 쿨한 공간을 표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색감이었다. 특히 붉은색이 격렬한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후반부를 위해 초반장면에 숨죽이고 있다면, 초반부터 후반까지 전체적인 톤을 장악하는 것은 녹색이다. 김지운 감독은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형광등에서 나오는 건조한 느낌의 녹색을 주된 색으로 가져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녹색은 스카이라운지 세트에도 쓰였는데(⑤), 도시적이며 인공적인 냄새가 물씬한 톤의 외벽으로 사용돼 메마른 선우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스카이라운지 한가운데 비밀을 품고 서 있는 나무와 그 아래를 흐르는 물에도 녹색은 등장한다. 밀매 사무실에서 사용된 녹색 또한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사용됐다.
하지만 명암 대비에서와 마찬가지로 희수 집의 경우는 좀 다르다. 희수의 집에서 주색조를 이룬 녹색은 자연적인 녹색에 가까웠다. “푸근하고 바람이 왔다 가는 곳에 사는 여자의 느낌”이라는 류성희 감독의 이야기처럼 희수의 공간은 아늑하고 따뜻한 녹색을 사용했다. 희수는 심지어 옷도 녹색 톤을 걸치게 된다. 김지용 촬영감독은 “녹색은 희수의 상징색이다. 영화 전체에서 희수가 중심에 놓여 있으므로 전반에 걸쳐 녹색이 드리우게 된다”고 설명한다.
컬러 콘트라스트는 흑과 백의 톤에 두드러지는 색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⑥). 김지운 감독은 명암과 컬러 콘트라스트를 통해 “리얼리스틱한 조폭영화와 확연한 구분점”을 그으려 했고, 세심한 컨트롤을 통해 지나친 과장은 피하려 했다. 또한 본격적인 색채의 움직임은 감정 변화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다.
감정 변화와 비주얼
드라이에서 웨트로, 쿨에서 핫으로
“드라이(dry)에서 웨트(wet)로, 쿨(cool)에서 핫(hot)으로.” <달콤한 인생>의 제작진이 설명하는 시각 컨셉은, 사실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관통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아무 문제없는 듯 살아가다가 갑작스레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한 남자를 죽 쫓아가는 이야기, 그러니까 김지운 감독식으로 설명하면 “쿨하고 드라이했던 인간이 점점 젖어가는 이야기”인 탓에 필연적으로 감정의 격렬한 변화가 일어나고, 이러한 감정의 출렁임은 다양한 시각 장치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달콤한 인생>은 다양한 시각장치를 통해 선우의 감정변화와 이야기의 흐름을 표현한다.
이런 감정에 따른 비주얼의 변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 스카이라운지다. 영화의 초반부, 스카이라운지 관리를 주업무로 하는 깔끔한 슈트 차림의 선우는 지하 룸살롱에 골치아픈 일이 발생했다는 전갈을 받는다. 서두르지 않고 에스프레소와 후식으로 나온 케이크를 먹은 그는 지하로 걸어가기 시작한다(⑦). 이때만 해도 스카이라운지는 지극히 정돈돼 있으며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하얀 불빛에 감싸여 있다. 영화 중반부가 되면 백 사장이 찾아오고 동료인 문석(김뢰하)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⑧). 명암의 콘트라스트가 강해져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색채는 초반보다 진한 느낌을 준다. 후반부에 가면 선우의 모든 것을 건 혈투가 시작된다. 그는 최후의 일전을 벌이듯 결연한 모습으로 감정을 폭발한다(⑨⑩).
이에 따라 무언가 메마르고 담담한 느낌의 공간도 울부짖고 숨겨졌던 본색을 드러낸다. 명암은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고, 붉은 빛은 뜨거운 감정을 토해내듯 채도가 높아지며 색은 번진다. 김지용 촬영감독은 “이런 끈적끈적하고 습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필터도 쓰고, 설정등이나 조명의 광량도 높였다. 촬영뿐 아니라 미술, 의상, 분장도 같은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함께 보조를 맞췄다”고 말한다. 또 디지털 색보정 과정에서도 채도를 보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