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빛과 컨셉을 스스로 머금고 있도록
“공간을 디자인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빛이었다.” 세트뿐 아니라 공간 전반에 관한 컨셉 구상을 김지운 감독에 지시받았던 류성희 미술감독은 누아르영화답게 빛에 관한 고민이 가장 컸다고 말한다. 강렬하면서도 입체적인 콘트라스트는 조명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탓에 세트나 공간 자체가 빛을 머금게 하는 것이 주된 포인트였다.
선우의 주공간이자 후반부 격렬한 대립이 펼쳐지는 호텔 스카이라운지 세트. 양수리 1세트장에 차려진 135평의 공간은 꼼꼼한 스케치에 맞춰 만들어졌다.
“주인공 선우(이병헌)가 모든 것을 시작하고 다시 돌아와 끝을 맺는 자리이며, 다시 돌아왔을 때 파국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공간”인 탓에 가장 중요했던 스카이라운지를 디자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최후의 대결이 펼쳐질 이 공간이 남자 두명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것은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로 구현됐다. 특히 바 앞을 가로지르는 공간에 패션쇼의 런웨이를 연상케 하는 수평의 흰 띠를 집어넣고(③) 그 안에 조명을 설치했으며, 스카이라운지 곳곳에도 밝은 조명등을 붙였다. “감정이 점점 커져 마침내 분출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 가장 효과적인 색채”라는 생각에서 붉은색을 주된 색조로 선택했다. 또 김지운 감독은 스스로를 비춘다는 반사의 느낌을 중시했기 때문에 바와 테이블, 의자 등 집기를 빛이 퉁겨져나가는 재질로 사용했다. 대부분의 앵글이 천장을 비추므로 위쪽에 조명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했다(②). 세트의 창 밖에 놓이는 배경(호리존탈) 또한 신경을 많이 쓴 부분. 천으로 만든 일반적인 배경으로는 도심의 화려한 야경을 살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 국내 최초로 광고판 등의 재질인 파나플렉스를 사용한 초대형 배경을 만들었다(①). 사실, 서울 시내에 이 정도로 화려한 야경이 없어 여러 빌딩의 야경을 찍어 합성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화사한, 여성스런 공간인 희수의 집. 레이어를 많이 설정해 신비감을 부각시켰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어둠과 빛이 격렬하게 충돌하지 않는 공간은 여주인공 희수(신민아)의 집이다. 희수는 행동이나 외모는 팜므파탈보다 롤리타에 가깝지만, 결국 선우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선 누아르의 여주인공답다. 하지만 그의 공간은 유일하게 여성적이고 빛이 충만한 곳이다. 겹이 많고 오밀조밀하면서 신비로운 느낌으로 디자인돼(④), 영화 속에선 오아시스 같은 기능을 한다(⑤).
선우가 총을 손에 넣게 되는 밀매상 사무실. 한국사회에서 총이란 요소가 희귀하다는 것을 고려해 판타스틱한 느낌이 배어나도록 설계됐다.
선우가 총기를 구입하는 밀매상 사무실은 기묘한 느낌을 주도록 디자인됐다. 김지운 감독은 ‘해적소굴’을 원했고, 류성희 감독은 이를 ‘원더랜드’로 해석했다. 공간 자체는 밀수한 물건들이 곳곳에 빽빽해 음습한 분위기지만(⑧), 이곳은 영화가 잠시 비현실적인 영역의 느낌을 품고 있는 부분이므로 녹색과 바이올렛 색의 조화로 아기자기해졌다(⑥). 특히 밀매상(김해곤)까지 희한한 디자인의 털옷을 입고 있어 이 신비감은 더욱 살아난다(⑦).
<달콤한 인생>의 누아르 스타일은 로케이션과 오픈세트에서도 일관성을 보여준다. 빛과 어둠, 그리고 색채의 대비를 강조했고,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선우가 감금됐다가 탈출을 시도하는 공간은 경기도 청평의 한 공장터에 마련됐다. 실제 공장으로 운영됐던 곳이라 공간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었고, 김지운 감독이 원한 “나뉜 듯 열린 느낌”을 위해 가벽과 구멍이 곳곳에 만들어졌다(⑨). 특히 선우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기 전이라는 의미를 가진 공간이기에 잿빛 모노톤을 강조했다.
밀매상 사무실로 가기 직전, 선우가 접선을 기다리는 곳은 인천의 한 폐항구(⑩)에서 촬영됐다. 비현실적이리만치 탁 트인 황야가 마치 서부극의 한 장소를 연상시키는 이곳은 ‘원더랜드’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자, 선우가 빛과 어둠의 공간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화려한 야경을 뒤로하고 격렬한 액션을 펼친다, 는 김지운 감독의 구상은 구현되기 어려웠다. 쿨하고 드라이했던 선우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모습을 드러내는 다리 앞 격투신은 결국 복잡한 한남대교 앞에서 찍을 수밖에 없었다(⑪). “우리도 한가한 다리에서 찍고 싶었지만 그나마 한강다리 중에선 한남대교의 신사동 방면이 가장 불빛이 많더라”고 이유진 프로듀서는 말한다. 또 김지용 촬영감독은 관습화된 푸른빛 톤이 싫어서 야외장면에서도 HMI 조명 대신 텅스텐을 이용했다. 그는 디지털 색보정 작업에서도 전체적인 톤을 맞추는 일뿐 아니라 푸른색을 걸러내기도 했다.
밀매상 사무실에서 나와 최후의 결전을 펼치기 위해 나오는 길목에는 축축하고 끈적한 복도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선우가 ‘이상한 나라’에서 현실로 빠져나오는 관문이고, 선우의 쿨하고 드라이한 성격이 완전히 젖어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머리 위로 파이프가 지나가고, 좌우로 너절한 분위기가 펼쳐지는 이 복도(⑫)는 선우의 앞날이 더 이상 달콤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