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시나리오 작가가 적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의 일이다. 1980년대 만화방 만화에 대량 생산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작화와 스토리의 분업이 시도됐고, 유명한 만화방 히트작에는 이름 모를 시나리오 작가가 숨어 있었다. 그들은 90년대가 되어 김세영, 야설록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표기하기 시작했고, 야설록처럼 시나리오 작가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역전된 상황이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나리오는 만화에 있어 부가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하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만화의 완성도에 있어 시나리오가 차지하는 부분은 30% 정도라고 보면 된다(어느 유명 작가의 인터뷰에서 본 내용이다). 그렇게 시나리오는 만화의 한 부분으로만 조립되어 있었다. 궁극적으로 이야기 만화에서 독자들에게 공명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등장인물의 감정을 감염시키는 것이, 한회 한회 독자를 붙들어놓아야 하는 서스펜스를 구조화하는 것이 ‘시나리오의 힘’이라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결국 한국 만화의 이야기는 앙상해졌고, 초라해졌다.
윤인완은 자신의 이름으로 독자를 끌어당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젊은 시나리오 작가다. 양경일과 이룬 환상의 복식조는 한국 작가가 일본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사랑의 이야기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에 담아내어 단행본을 출간했다. 짧은 단편은 모두 ‘운명적 만남’이라는 구태의연해 보이는 주제를 그리고 있는데, 이 낯익은 이야기들이 실존 인물과 엮이며 마음을 흔든다. 사람이란 본디 이런 운명적 사랑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본편 4편과 번외편 2편이 있다. 양경일, 윤승기, 김태형, 박성우, 변병준 등 작가들은 모두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를 매력적으로 재현했다. <레드블러드> 이후 게임 일러스트 작가로 본업을 바꾼 김태형의 만화도 반가웠고, 본편은 아니지만 변병준의 작품도 섬뜩하리만큼 힘이 있다.
서점에서 팔리는 책을 만들어보려는 출판사의 의도가 과도한 하드커버의 무게로 다가왔지만, 솔직히 이렇게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양장보다는 좀더 사고 싶게 만드는 디자인이 필요했을 터이다. 두터운 하드커버 양장이 고급만화를 만들어주는 신의 손은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