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 휴일이라 회사가 썰렁하다. 주초에 휴일 있다고 마감을 하루 늦춰도 되는 게 아닌지라 기자들은 전부 나와 기사를 쓰고 있지만, 다른 부서엔 출근한 사람이 거의 없다. 인구밀도가 줄어서 숨쉬기는 편하지만 텅 빈 공간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남들 노는 날 일하는 것도 억울한데 휴일이라 난방마저 끊긴 탓이다. 명랑만화처럼 기자들 얼굴에 빗금이 그어져 있는 듯한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사무실에 앉아 외투를 걸친 채 일하는 기자들 모습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진 않는다. 춥다고 투덜대는 기자들을 피해 약속이 있는 척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은 추워서 도망가는 거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으면서.
문득 여기저기서 봄소식이 올라오는 3월이 진짜 겨울인 1, 2월보다 춥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꽃샘추위가 아니라도 얇게 입고 나섰다가 낭패 본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1, 2월엔 ‘그래, 겨울이니까’ 싶어서 단단히 대비해 옷을 입고 난방이 끊길 리도 없지만 3월쯤 들어서면 추위를 두려워하던 마음가짐도 흐트러지고 난방을 하는 쪽에서도 ‘이제 봄인데 뭐’ 하는 심사가 된다. 덕분에 실내에서 오들오들 떨다보면 “봄이 왔다”는 소리가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 또 속을까보냐’ 싶어 한겨울에 입던 외투를 그대로 입고 나와 꽃샘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 외투를 걸치고 홍익대 앞에 나갔다가 갑자기 등에 식은땀이 났다. 화사한 봄옷을 입은 사람들, 미니스커트의 여인들이 발에 채인다. 아뿔싸! 내 삶의 지혜는 그냥 아저씨다운 행동일 뿐이구나. 3월의 추위에 떠는 자들을 비웃겠다는 내 망상은 나이 먹으면서 생긴 볼품없는 굳은살이 아닌가. 아무리 추워도 더는 겨울옷을 입기 싫었던 젊은 날이 내게도 있었는데…. 봄 날씨의 변덕을 의심하고 겁내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시 봄옷으로 무장한 젊은 남녀들을 보면서 내가 비웃음거리가 된 것 같아 가슴이 뜨끔해졌다.
이런 게 나이들어 보수적이 되는 자연스런 경로일까? 경험이 만들어준 방어본능을 삶의 지혜라 여기며 봄옷으로 갈아입길 두려워하는 마음, 그런 노파심이 커져서 무엇이든 변화에 대해 경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정치적 진보와 보수가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고 말하면 돌 맞기 십상이지만 나이와 보수성의 상관관계를 부정할 순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답답한 겨울옷을 못 견디는 쪽이 세상의 변화에도 민감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최근 뉴스를 보니 10년 뒤엔 대한민국 평균나이가 50살을 넘는단다.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봄을 먼저 느끼는 사람이 그만큼 준다는 얘기도 된다. 3월인데 아무도 겨울옷을 벗지 않는 거리 풍경을 상상해본다. 경제활동 운운하기 전에 이건 미관상으로 너무 아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굳이 한줄로 정리한다면 ‘꽃샘추위 두렵다고 겨울옷 껴입고 움츠려 있지만 말자’쯤 되려나. 그런데, 그런데… 이런 말 하긴 아직 너무 춥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