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생각보다 풍요롭다. 셀애니메이션과 3D애니메이션으로 양분되는 상업애니메이션의 바깥에도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존재한다. 인형애니메이션은 인형의 동작을 조금씩 바꾸면서 프레임별로 분리해서 촬영하는 스톱모션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이다. 협소한 분류법으로 재단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인형애니메이션은 인형을 제작하는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 하부장르로 나뉜다.
예를 들어 특수진흙을 사용하면 클레이메이션(Claymation), 종이를 사용하면 종이인형애니메이션(Paper-stand animation), 꼭두각시 인형을 사용하면 퍼펫애니메이션(Puppet animation)으로 불린다. 인형애니메이션은 태생적으로 훌륭한 입체감을 지니고 있지만 속도감이나 감정의 표현에 능하지 못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분업이 불가능하고 장기적인 제작기간을 필요로 하는 까닭에 상업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는 소외된 장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같은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와 독특한 작품세계를 지닌 작가들에 의해 생명력을 지속해오고 있다.
캐나다 NFBC(*박스참조)의 코 회드만은 2차원의 사물에 영혼을 불어넣는 인형애니메이션의 조물주다. 1940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1965년에 캐나다로 이주한 그는 NFBC의 제작조수를 거쳐 전속작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71년에는 국제적인 명성의 체코 이지 트릉카 스튜디오에서 연수를 마쳤다. 코 회드만이 인형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72년작 <추추>(Tchou-Tchous). 이 작품이 안시와 런던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을 석권하면서 코 회드만은 인형애니메이션의 대가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형, 오브제, 절지를 이용한 고전적인 기법뿐 아니라 여러 가지 새로운 재료(<모래성>(Sand Castle)에서의 모래)를 찾아서 실험을 거듭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킁킁거리는 북극곰>(The Sniffing Bear)이나 <에코의 정원>(The Garden of Ecos) 같은 작품에서는 15분 내외의 짧은 시간 속에서 ‘약물중독’이나 ‘환경파괴’에 대한 주제의식을 소박하지만 진지한 온기를 담아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느 애니메이션의 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코 회드만은 어린이에 대한 애정을 기본적인 이념으로 삼고 작품을 제작한다. <마트로시카>(Matrioska)는 러시아 민속인형인 마트로시카를 통해서 ‘크기’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는 작품이고, <루도빅>(Ludovic) 시리즈는 테디 베어 루도빅을 통해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삽화들을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작품이다.
이번 작가전은 코 회드만이 30여년 동안 작업실에서 창조해온 다양한 작품들을 모두 품고 있다. 2차원에 갇혀 있던 무생의 존재들이 3차원의 공간에서 피와 살을 얻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루도빅>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작품이 나온 시기에 따라서 작가전 1, 2, 3으로 분산되어 있는 만큼, 70여분 길이로 정리된 세개의 작가전을 모두 챙겨보는 것이 좋다.
환경과 삶, 인간의 내면과 동심의 세계를 그리는 거장 코 회드만 작가전 주최: (주)라바메이저,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중앙시네마 후원: 주한 캐나다대사관 일정: 3월14일(월)∼4월7일(목), 매주 월∼목 저녁 7시30분 장소: 중앙시네마 5관 예매 및 문의: 중앙시네마 홍보팀(02-776-9024), 라바메이저(02-765-8312) 관람료: 6천원 ☞ 상영일정표 보러가기상영작 소개
<추추>
여러 가지 색채로 이루어진 장난감 도시에서 블록 인형들이 겪는 모험을 다룬 작품. 3천여개의 블록으로 이 작품을 만든 코 회드만은 블록이 서로 맞부딪히는 효과음을 이용해서 음악적인 효과를 가미한다. <추추>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정사각형 블록이라는 단순한 입방체들이 역동적이고 풍요로운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특히 코 회드만은 세개의 블록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의 각 블록을 새롭게 교체하는 등 여러 형태의 조합으로 바꾸어냄으로써 세부적인 동작을 묘사해낸다. 단출한 오브제의 한계를 세밀하게 계산된 연출과 독창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넘어서려는 코 회드만의 시도가 성공적인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올빼미와 갈까마귀> <올빼미와 레밍>
코 회드만은 끊임없이 캐나다 원주민들(이누크족)의 잊혀진 전통과 전설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이 두 작품에서 그는 이누크족의 동물 기원설화를 간결한 방식의 인형애니매이션을 통해 풀어본다. 이외에도 <남자와 거인>(The Man and The Giant/ 1975/ 7:33)은 강의 기원에 대한 이누크족의 설화를 ‘실사’와 전통적 돌인형의 몽타주를 통해 보여준다. 이누크족의 기괴한 전통음악이 삽입되어 묘한 기운을 전해주는 예외적인 작품이다.<모래성>
모래에서 태어난 모래인간이 모래로 친구들을 만들고, 그들이 힘을 합쳐 모래의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형상화한 작품. 모래 캐릭터들은 철사로 채워서 움직임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포 고무 인형 위에 모래를 코팅해 만들었다. 인형애니메이션에 도입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모래의 질감을 제대로 살려낸 실험적인 작품이며 코 회드만의 대표작으로도 자주 거론된다. 재료에 대한 코 회드만의 끊임없는 도전에 경의를 바치듯 1987년 아카데미는 이 작품에 최우수 애니메이션상을 수여했다.<찰스와 프랑소와>
할아버지 찰스와 손자 프랑소와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의 생애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전을 보여주는 작품. 3D와 페이퍼 컷 아웃 기법 등이 함께 쓰인 이 아름다운 동화는 짧은 시간 속에 현대사회의 가족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삽화를 제시한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요?”라는 마지막 대사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폭을 15분 분량의 종이인형애니메이션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박스>
코 회드만 자신이 등장해 종이박스로 인형을 만든다. 인형은 곧 성장해서 바깥 세상을 배우고, 사랑에 빠지며, 집과 작은 마을을 만들어나가며 삶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기 시작한다. 종이박스만으로 생명과 인간사회에 대한 철학적인 주제를 아름답게 표현한 이 작품은, 2차원의 종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자신의 작업을 향해 코 회드만 스스로가 보내는 작은 선물처럼 보인다. 이처럼 코 회드만은 가끔 자신의 작품들에 전지적인 존재로 출연하기도 한다. 이는 갇혀 있는 인형애니메이션의 사유를 좀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하려는 작가적 시도로 보인다.<킁킁거리는 북극곰> 2차원의 절지 캐릭터에 평면적인 차원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서적 힘을 부여하는 코 회드만의 마술 같은 능력이 잘 표현된 작품. 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는 북극곰과 그를 도우려는 바다표범과 올빼미의 이야기를 통해 약물중독이라는 진지한 소재를 풀어낸다. 코 회드만은 소재와 기법의 한계에 대한 도전과 함께 현대사회에 대한 발언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킁킁거리는 북극곰>은 그 대표적인 작업물이다.
<테디 베어 루도빅 시리즈>
테디 베어 루도빅의 일상을 사계절을 따라 네편의 연작으로 만든 작품. 버려진 인형을 보살피고, 종이인형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방을 보면서 할아버지의 추억들을 느끼는 루도빅의 일상이 따스하게 그려진다. 캐나다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 마리 프랑신 에베르와의 공동각본으로 만들어졌다. 노년의 코 회드만이 아이들을 위해 만든 시리즈지만, 쉽게 비밀을 복제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독특한 카메라 움직임은 인형애니메이션 대가의 기술적인 노하우를 잘 보여준다. 루도빅이라는 테디 베어의 성격 역시 단순한 어린아이의 환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년 시절의 다양한 면들을 회고하는 코 회드만의 개인적인 상념들이 배어 있다. 이번 작가전에서 <테디 베어 루도빅 시리즈>는 세개의 작가전 말미에 골고루 흩어져서 프로그램되어 있다.<마리안느의 극장>
그림자 인형극 기법이 처음으로 시도된 코 회드만의 최근작. 카메라는 큰 인형이 작은 그림자 인형들을 부리는 것을 다채로운 서커스의 형식을 통해 보여주다가 마지막에는 큰 인형 또한 인간에게 조종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창조물에 대한 코 회드만의 깊은 애정과 인형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대한 작가적인 자아 드러내기가 조화롭게 표현된 작품.애니메이션 작가를 위한 꿈의 공장
NFBC(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캐나다국립영화위원회)
캐나다의 영상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1939년에 설립된 국립기구. 세계 각국의 애니메이션 작가들을 데려와 그들의 생활과 창작에 필요한 제반요소들을 지원하는 꿈의 장소다. 일반 기업의 후원금이 전혀 없이 전적으로 정부 자금으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라는 것이 특색이며, 이같은 NFBC의 운영 철학을 바탕으로 많은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좀더 실험적이고 작가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NFBC를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작가로서는 코 회드만 외에도 핀스크린 기법의 대가인 자크 드뤼앵, 모래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진 캐롤라인 리프, 인도 출신의 이슈 파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