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삶 살고픈 대중의 변신욕망 반영
내가 내가 아는 내가 아니라면? 교통사고로 부분 기억 상실증에 걸린 혜찬(가운데)은 현실의 남편과 동생을 부정하고 달아나려 한다
“넌 누구냐?”
한국방송 월화드라마 <열여덟, 스물아홉>(극본 고봉황·김경희, 연출 김원용·함영훈)의 주인공 혜찬(박선영)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던지는 질문이다. 스물아홉해를 살아왔지만, 사고에 따른 부분 기억상실로 열여덟까지의 자신만을 기억하게 된 그다. 11년의 간극 앞에서 그는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의 흔들림을 겪으며,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써나간다.
요즘 드라마들이 불쑥 ‘내가 누구인가’를 되묻기 시작했다. 이런 물음에 노출된 주인공은 혜찬만이 아니다. 23일 첫회가 방영되는 문화방송 새 수목드라마 <신입사원>(극본 이선미·김기호, 연출 한희)도 이런 정체성의 흔들림을 극의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 주인공 강호(에릭)는 권투선수 출신의 태평하고 뻔뻔한 백수에서 어느날 국내 손꼽는 대기업에 수석 입사하는 대변신을 경험한다. 전산착오에 따른 것이지만, 이를 덮으려는 실무진의 용인 속에 그는 ‘삼류’ 백수에서 사내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일류’ 인재로 급격한 정체성의 변화에 내몰린다.
21일 첫 전파를 타는 에스비에스 새 월화드라마 <불량주부>(극본 강은정·설준석, 연출 유인식·장태유) 또한 유사한 질문을 품고 있다. 대기업 영업과장으로 전업주부 ‘마누라’를 발톱의 때만큼도 안 여기던 마초맨 구수한(손창민)이 실직 뒤 전업주부로 변신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자신이 ‘수컷’임을 잊지 않고 회귀하려고 몸부림치지만, 어느덧 바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즐기게 된다.
에스비에스 수목드라마 <홍콩 익스프레스>(극본 김성희, 연출 조남국)도 주인공의 가짜 정체성이 주요한 극적 장치의 하나로 사용된다. 민수(조재현)는 홍콩 뒷골목의 ‘양아치’ 인생이었지만, 교통사고를 낸 재벌2세를 대신한 감방살이 끝에 하버드대 출신의 투자전문가로 행세하기에 이른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본래 모습과 유능하고 박식해 마땅한 지금의 위장된 정체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극적 긴장을 자아낸다.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의 질문이 미니시리즈 시간대를 대거 장악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변신 욕망의 대중화를 반영한 것이라는 풀이가 가장 먼저 꼽힌다. 구본근 에스비에스 책임피디는 “경제 불황기엔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커질 수 밖에 없다”며 “하지만, 지난해 유행했던 신데렐라 드라마 같은 판타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보다는 좀 더 현실감 있는 ‘대리인생’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라고 봤다.
대중적 욕망의 근저에는 빛의 속도로 바뀐다는 현실세계의 변화가 있다. <불량주부>의 장태유 피디는 “남자 전업주부는 이미 한국사회 일각에서 대두하고 있는 사회현상”이라며 “지금껏 드라마에선 단편적 묘사나 일부 캐릭터로 표현된 것을 미니시리즈 전체를 끌고가는 주제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말했다. 장 피디는 “스포츠나 연예스타의 급격한 부침이 일상화한 현대사회 대중들이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정체성 변화에 대한 대리만족을 추구하려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정체성 갈등이 드라마의 재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유용한 설정이라는 점도 함께 꼽힌다. <신입사원>의 한희 피디는 “얼뜨기가 엘리트로 비쳐질 때의 격차가 재미를 생산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불량주부>와 <열여덟, 스물아홉> 등도 여성의 위치에 놓인 남성, 11년전 10대의 사고방식을 지닌 29살 어른 같은 모순 구도가 빚어내는 이중성과 아이러니가 극적 재미의 원천이 되고 있다.
정체성의 흔들림을 다루는 방식이 주로 코믹 드라마로 나타나는 점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희극성은 ‘자동주의와 경직성의 결과’라고 말한 바 있다. 누군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폭소의 연속으로만 이어질 때 코미디 프로그램과의 차별성은 무엇일까? 한희 피디는 “정체성의 격차가 코믹과 함께 빚어내는 페이소스(비애) 또한 드라마의 주요한 재미가 될 것”이라고 했고, 장태유 피디는 “그게(페이소스) 없다면 공감이 약해질 것임을 잘 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