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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단편 <결전의 날이 왔다> [1]
김도훈 2005-03-08

독립단편영화계의 SF블록버스터 <결전의 날이 왔다>가 만들어지기까지

USC대학의 영화과 학생 조지 루카스가 15분짜리 SF단편 <THX1138: 4EB>를 만든 것은 1970년이었다. 예브게니 자마친의 <우리들>을 연상케 하는 이 자그마한 소품에서 <스타워즈>의 미래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루카스의 선배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달랐다. 그는 고독하게 작업하는 괴짜 대학생에게 거금의 제작비를 덜컥 지원했고, 루카스의 장편 데뷔작 <THX1138>은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200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하나 벌어지고 있다. 충무로 스탭들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작은 독립 SF영화 <결전의 날이 왔다>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60%에 달하는 분량에 상업영화 수준의 CG와 3D애니메이션, 제법 비용이 들어갈 세트가 필요했던 이 작품은 가능성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프로젝트였다. 박선욱(35) 감독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냈고, 영화는 이제 지루하고도 꼼꼼한 후반작업만을 남겨놓고 있다. 어떻게 한명의 독립영화인이 홍익대 앞의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던 걸까. 이것은 기이한 독립단편영화계의 SF블록버스터가 지구에 도달한 과정을 따라 숨차게 달려가는 짧은 시나리오 축약판이다.

“가능성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불가능성의 한계까지 밀어붙여보는 것이다.” - 아서 C. 클라크(SF작가)

<결전의 날이 왔다>(영어제목 <The Day>)는 외계인의 지구침공을 다루는 15분 분량의 단편영화다. 다른 외계 종족과 전쟁을 치르던 K2 행성인들은 갑작스레 날아온 혜성과의 충돌로 삶의 기반을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된다.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행성을 찾아야 하는 그들의 목표는 이제 푸르고 비옥한 ‘지구’라는 행성이다. <결전의 날…>의 시나리오에는 50년대 펄프 매거진에 등장했을 법한 소재들(외계인 침공, 우주전쟁)과 코미디가 제법 유쾌하게 어우러지고, 단편영화의 짧은 내러티브에 으레 쫀득한 맛을 더하는 반전도 숨어 있다. <결전의 날…>은 10여년 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감독이 수업시간에 노트에 끼적인 단상들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다. 다만 전국 수백만장의 노트에 끼적여진 다른 고등학생들의 꿈과는 달리 박선욱 감독의 꿈은 재활용 폐지더미 사이로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를 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고, 자식 딴따라 만들기 싫어하던 부모님도 구슬릴 겸” 컴퓨터공학과에 들어간 그는 슬그머니 독립영화계에 이름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의 디지털 단편 <Someone>(2000)과 <REM>(2002)은 레스페스트와 각종 인디영화제에서 주목받았고, <Broken Morning>(2003)과 35mm 단편 <자전거를 타고 온 크리스마스>(2003)는 다수의 해외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결전의 날…>을 위한 결전의 날은 오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기술적인 제약들 때문에 쉽사리 첫발을 내딛지 못하는 감독 스스로의 의구심이었다.

술김에 제작에 착수하다

사건의 발단은 항상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오는 법이다. <빵과 우유>의 원신연 감독과 <호흡법>의 이영석 감독을 사석에서 만난 그는 <결전의 날…>을 슬그머니 끄집어냈다. 두 친구는 “술김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제작에 착수하라고 부추겼다. 역시 “술김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박선욱 감독은 이미 촬영 준비를 마친 <구름재>라는 영화를 엎고 <결전의 날…>의 도면을 펼쳤다. 문제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프로젝트인 만큼 욕심도 슬금슬금 늘어갔다는 사실이다. “처음엔 6mm로 찍을 생각도 했다. 하지만 6mm로 찍어서 버전업을 하면 CG 분량의 디테일이 완전히 깨질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필름으로 제대로 찍자. 하지만 35mm는 비싸니까 슈퍼16mm로 찍어서 35mm로 인화하자고 생각했다.” 예산대비 최적의 결과가 일차적 목표였다. 슈퍼16mm 카메라는 렌트비도 하루 15만원으로 저렴했고, 독립영화협회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었던 덕분에 이틀 정도는 회원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무료로 카메라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결전의 날까지 갈 길은 멀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테제는 그때부터 확연히 박선욱 감독의 앞길에 서광을 내리기 시작했다. 상업영화를 하면서도 새로운 장르에의 도전에 목말라 있던 충무로 전문가들이 때로는 지인을 통해, 때로는 흘려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실현 가능성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조마조마했다. 내가 너무 무모하게 욕심을 내는 것 아닌가. 내가 완성할 수 있을까. 과연?”

분장과 의상의 프로를 찾아라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분장과 의상이었다. 파충류의 모습을 지닌 인간형 외계인과 갑각류 형태의 의상을 만드는 것은 최고의 기술자를 초빙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럴 만한 돈은 물론 없었다. 박선욱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과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을 작업했던 특수분장가 이창만 팀장을 찾아갔다. 그가 원신연 감독의 작품을 포함한 다수의 독립영화들을 남몰래 지원해왔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창만 팀장은 “상업영화에서 시도된 적 없는 기발하고 창의적인 요소들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전문가와 일하는 것은 현실적인 타협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뿔이 입 주위로 나 있고, 앞머리가 파충류처럼 툭 튀어나와 있는 초기 디자인은 수정되어야만 했다. “애초의 디자인으로는 주인공이 웃어도 관객은 그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겁니다”라는 이창만 팀장의 지적에 귀를 기울인 결과였다. 특수분장에 들어간 돈은 모두 300만원 정도. 특수렌즈는 미국에서 주문해야만 했기 때문에 150만원 정도가 추가로 들어갔다. 의상은 특수의상을 전문으로 하는 ‘J House’라는 프로덕션에서 만들었다. 박선욱 감독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J House’로 무작정 찾아가서 사정했다. “내가 쓸 수 있는 비용은 이 정도다. 그 이상으로 욕심은 나지만 사장님이 영화에 도움을 주실 수 있다면 좋겠다.” ‘J House’의 김재형 대표는 그 솔직함을 마음에 들어했다. 3명의 주요 캐릭터 의상을 제작하는 데는 각각 150여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이 정도의 비용이라면 감내하고도 남을 만했다.

스탭들의 말

“단편영화 사상 이런 영화는 처음이다!”

특수효과 문봉섭(<화산고>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단편영화계에서는 이런 영화가 전무했기 때문에 무척 욕심이 나는 작업이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작업은 우주선을 디자인하고 세트를 직접 만드는 일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다른 충무로 관계자들이 세트에 들렀다가 귀퉁이에 신기한 게 놓여져 있으니까 유심히 살펴보며 흥미로워했다. 청계천 돌아다니면서 모은 자재로 석달에 걸쳐 만든 우주선을 어쩔 수 없이 분해해야 하는 날이 오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말로 이런 영화는 처음이다. 단편영화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만 또 다른 가능성을 개척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세트 짓는 노가다만 빼고는) 또 뛰어들고 싶다.

2D 및 이펙트 김남식(‘Cinemeka’ 소속·<태극기 휘날리며> <아라한 장풍대작전>) 대본을 우연찮게 보게 되어 뛰어든 일이었다. 상업영화에 뒤지지 않을 만큼 짜임새 있게 프리프로덕션이 갖추어져 있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욕심이 굉장히 났지만 ‘Cinemeka’는 상업영화를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연구개발 형식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향후 가치를 따져보더라도 큰 매력이 있을 것 같았다. 아직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20분에 달하는 영화 전체를 디지털로 스캔하고 색보정할 예정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본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의 상업영화 수준으로 만들 거라는 것이다. 광고나 CF야 어느 정도 자본이 들어가야 양질의 결과물이 나오지만, 영화쪽은 아직 조금은 순수한 사람들이 일하는 곳 아닌가. 돈보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테크니컬 슈퍼바이저 권순범(‘In Frame’ 소속·<태극기 휘날리며> <아라한 장풍대작전>) 박선욱 감독과 만난 첫날에 설렁탕 집에서 소주 한잔 놓고 밤새도록 이야기했다. 피곤한 날이었는데 마음이 잘 통했다. 그래서 “그냥 한번 해봅시다!” 하고 뛰어들었다. 사실 제대로 된 과정을 밟으려면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참여해야 하는 게 옳지만, 이미 실사 촬영을 마친 뒤에 이 영화를 만나게 된 것이라 부담도 있었다. 게다가 돈이 되는 일은 아니라 철저하게 작품 하나만 믿고 따라가는 거 아닌가. 하지만 감독이 스크립트와 콘티를 너무 세세하게 잘 만들어놓아서 크게 무리는 없겠다 싶었다. <결전의 날이 왔다>는 전면 디지털로 색보정 작업 등을 해야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아라한 장풍대작전>도 10분 내외의 분량만 이런 작업을 거쳤을 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작업이고 양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독립영화로서는 보기 힘들 정도의 양질의 CG가 나올 것으로 자신한다.

세트 제작 박병덕(‘AI’ 소속·<태극기 휘날리며> <내츄럴시티> <청연> 등) 우주선 세트는 바닥 자체가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예산영화이니만큼 기계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고, 수동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세트 높이만 해도 3m가 넘는 거라 좀처럼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그래도 독립영화계에서 요청이 들어온다면 당연히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기술력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계속 도전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우리의 자본 아니겠는가.

특수의상 김재형 ‘J House’ 우리는 영화보다는 게임쪽 일을 많이 해왔다. 한국 영화계에서는 SF나 판타지영화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박선욱 감독을 만났을 때 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결전의 날이 왔다>가 드문 SF 장르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단편영화쪽에서 아이디어가 좋은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까 거기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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