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영혼’을 다루는 영화는 수없이 많지만, 그들을 단순무식한 이분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너무 아프고 힘들어, 라고 악쓰며 칭얼대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여자, 정혜>는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데 이건 실패하기 쉬운 우회로를 택했다는 뜻이다. 상처의 기승전결을 직설법이 아닌 다른 대체재로 풀어가겠다는 것이고, 그 은유의 화술은 자칫 작가의 예술적 자의식 안에 갇혀 소통의 출구를 잃어버리기 쉽다. 아니면 젠체하나 실은 식상한 비유의 세계에 머물러 있거나.
<여자, 정혜>는 모험적으로 그 덫들을 피해간다. 우선, 정혜의 사적이고 공적인 공간들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거다. 조그만 아파트 안에서 식물처럼 호흡하며 물을 섭취하고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살아 있다는 자각을 느끼는 정혜의 사적인 일상들. 조그만 우체국 안에서 모두 바삐 움직이지만 소란스럽지도 유별나지도 않는 정혜의 공적인 일상들. 그러다가 문득 낯선 남자에게 “저희 집에서 저녁 먹을래요?”라고 불쑥 다가서는 정혜에게서 궁금증이 일게 마련이다.
정혜는 필요한 모든 물건을 TV홈쇼핑을 통해 사들인다. 편리함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꺼리는 자기방어적인 행위다. 이런 그가 두툼한 원고 뭉치를 빠른 등기로 어디론가 보내곤 하는 초조한 기색의 남자와 친구들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처로 괴로워하는 남자 취객에게 슬그머니 먼저 맘을 연다. 반면 널려진 구두 다루듯 자신을 취급하는 구두 가게 남자 점원에게는 조심스러우나 명백한 혐오를 드러낸다. 길 잃은 어린 고양이와 야수적인 공격성을 잃은 수컷이 그에겐 동격이다.
이런 것들로 정혜의 사연을 헤아리기가 난감하다싶을 때쯤 몇 가지 회상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떠오른다. 상처의 정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상처의 효과를 이해시키는 방편이다.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향의 성격이었는지 순서는 알 수 없으나 정혜는 자신을 굳이 남들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쓰는 스타일이 아니다. 또 누군가에게 공격의 이빨을 세웠다가 그 이빨에 도리어 자신이 다치고 마는 인간이다. 신기하게도 영화는 이런 답답한 인간의 심사와 속앓이를 순식간에 폭발시키며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순간, 정혜와 그를 지켜보는 시선은 침착하고 격렬하게 위로받는다. 정혜의 망설이는 눈망울에서 영화는 끝나지만 이미 해피엔딩이 가능한 마무리라는 걸 모두가 안다. 정혜는 소설로 먼저 태어난 서술적인 캐릭터였으나 이 영화로 온기있는 피와 살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