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적 열성이 관료적 간섭 보다 더 중요한 영향력을 가졌던 영화제 황금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요즘 부천 국제 판타스틱영화제의 미래를 둘러싼 떠들썩한 공론이 있는 중에 한 때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영화제라는 20세기 현상은 영화에 대한 열정 보다 거의 전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결합의 덕택에 존재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영화제인 베니스 영화제는 1933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문화 쇼케이스로 창설됐다. 70년 이상이 지난 지금, 아직도 정치적 축구공과 같아, 우파 대통령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임명에 대한 추천을 한다.
칸느는 원래 베니스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설립됐다. - 1938년에 미국 영화가 이탈리아와 독일 정부의 배후 간섭 때문에 베니스에서 수상을 거절당하고 나서 “자유 세계”를 위한 영화제로 말이다. 아이러닉하게도 최초의 칸느는 ‘39년 9월로 예정됐으나 마지막 순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취소됐다. 그렇지만 영화제가 드디어 1946년 - 진정한 국제 행사로 - 개설됐을 때, 이는 공황을 맞고 있는 전후 유럽에서의 엔터테인먼트업계에 자극을 주고 각국이 업계를 쇼케이스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주로 경제적인 의도 때문이었다.
유럽의 또 다른 주요 영화제인 베를린인 마찬가지로 정치 선전 행사로 창설됐다. 미국 정부와 할리우드의 후원을 듬직하게 받은 영화제의 초창기 목적은 당시 공산주의 동유럽에게 서베를린이 아직 죽지 않았단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50년대와 60년대 초반 영화제 운영은 관료적 역량이 약간 있는 영화 팬들이 아니라 주로 영화에 관심이 있는 관료들이 진행했다. 70년대에 영화애호가 시스템에 스며들고 프로그램 선정이 영화제 자체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대변혁이 일어났고, “영화제 영화”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70년대 짧은 한 순간 동안 황금시대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영화제 규모가 커지면서 특히 80년대에 후원(그리고 그에 따른 요구)이 더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모든 지방 시장들이 자기 마을을 지도상에 올려놓거나 비수기에 호텔방들을 채워보려고 하면서 대부분의 작은 영화제는 단순히 관료적인 발단의 것으로, 프로그래머가 교체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게 됐다.
자기 시간의 90%를 프로그래밍이 아니라 관료주의적 회의나 후원자를 찾는데 보낸다는 영화제 집행위원장들과 수많은 오찬을 나눴다. 그리고 정치가들이 밀어낸 영화제 집행위원장들의 탄원서에 서명을 얼마든지 많이 했다.
베를린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20년 동안 맡았던 모리츠 드 하데른은 독일 정치가에 의해 해고 됐지만, 그 정치가 역시 6개월 후 해고당했다. 드 하데른은 다시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웠고, 그 후 베니스 영화제를 2년 동안 (잘) 운영하다가 다시 해고당했다. 이번엔 이탈리아 정치가에 의해서다. 아무도 그 정치가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모두가 드 하데른과 그가 선정했던 영화들을 기억한다.
필자는 부천영화제 초청으로 PiFan에 두 번 참가했고, 두 번 다 멋진 시간을 보냈다. 분위기는 PiFan이 옹호하던 종류의 영화를 완벽하게 반영했고, 이렇듯 김홍준 위원장과 김영덕 프로그래머와 김도혜 프로그래머는 사람들에게 러브호텔에서 일을 벌이는 것 외에 부천시를 방문할 만 한 이유를 준 것이었다.
현재 분투의 결과가 어떻게 되던, 사람들은 그 시절을 기억할 것이며, 그 자리에 새로 들어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그 추억들에 빗대어 판정을 받을 것이다. 부천시가 대한민국의 두 번째 중요한 영화제를 계속해서 개최하려면, 시 관료들이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Was there ever a Golden Age of film festivals, when cinematic enthusiasm counted more than bureaucratic meddling?
Amid all the current brouhaha about the future of PiFan, it's easy to think there was. But the truth is that the 20th-century phenomenon of film festivals owes its existence almost entirely to a combination of politics and economics rather than any passion for movies.
The world's first film festival, Venice, was set up as a cultural showcase for Italy's Fascist government in 1933. More than 70 years later it's still a political football, with appointments currently referreed by the country's right-wing president, Silvio Berlusconi.
Cannes was originally founded as a direct challenge to Venice - as a festival for "the free world," after a US movie had been denied a prize at Venice in 1938 because of behind-the-scenes meddling by the Italian and German governments. Ironically, the first Cannes, planned for Sept. '39, was cancelled at the last moment due to the outbreak of WWII. But when the festival finally launched in 1946 - as a genuinely international event - it was largely for economic reasons, to stimulate showbiz in depressed, postwar Europe and to give countries a chance to showcase their industries.
Europe's other major festival, Berlin, was also set up as a propagandist event. Heavily backed by the U.S. government and Hollywood, its initial aim was to show Communist East Europe of the time that capitalist West Berlin was not finished yet.
During the '50s and early '60s, festivals were largely run by bureaucrats with an interest in cinema, not cinephiles with some bureaucratic skills. The major change came in the '70s, as cinephilia seeped into the system, programming came under the control of the festivals themselves, and the concept of a "festival film" was born.
For one brief moment during the '70s, perhaps there was a Golden Age. But as festivals grew in size, especially during the '80s, sponsorship (and its demands) became ever more crucial. And as every local mayor has since looked to put his town on the map or to fill empty hotel rooms during the off-season, most smaller festivals have simply become bureaucratic initiatives in which programmers are seen as interchangeable.
I've had plenty of lunches with festival directors who say 90% of their time is spent attending bureaucratic meetings or trying to find sponsors - rather than programming. And I've signed plenty of petitions supporting this or that festival director who's been pushed out of a job by politicians.
Moritz de Hadeln, who headed Berlin for two decades, was fired by a German politician who was himself fired six months later. De Hadeln picked himself up and went on to run Venice (well) for two years, before being sacked again - this time by an Italian politician. No one remembers the politicians' names, but everyone remembers De Hadeln and the films he programmed.
I've been twice to PiFan, at the invitation of the festival, and had a ball both times. The atmosphere perfectly mirrored the type of films PiFan championed, and Kim Hong-joon, Ellen Kim and Creta Kim gave a reason for people to visit Bucheon other than to get laid in a love hotel.
Whatever the outcome of the current struggle, people will remember those times, and any newcomers in the jobs will be judged against those memories. If Bucheon is to continue to host South Korea's second most important festival, its bureaucrats need to be aware of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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