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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5] - 문승욱 감독
사진 오계옥이영진 2005-02-28

문승욱 감독의 <사랑의 이름으로>

문승욱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갑자기 남자가 좋아졌다.”

오해하지 마시라. 커밍아웃 선언이 아니다. <나비>를 끝내고 규모가 큰 첩보영화를 준비하던 문승욱 감독은 자료조사만 마치고 멈춰섰다. “머리로 쓰는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내 피부에 와닿는 걸 쓰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이 마흔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을 돌아본 것도 그때였다. “전엔 수다떠는 상대가 대개 여자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남자들로 바뀌어 있더라. 우정은 뭔가, 의리는 뭔가 하는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이 무렵, 그는 후배들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시고 귀가하던 중 택시에서 흘러나온 신파조의 노래에 끌리기도 했다. “그래, 남자 이야길 해보자.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 외로운 남자, 나잇값도 못하는 철부지 남자를 다뤄보자.” 결심은 그렇게 굳어졌다. 외로운 남자 이야기가 뜬금없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 다시 만들고 싶은” 데뷔작 <이방인>도 세상과 격리되어 배회하는 남자에서 출발한 영화가 아니었던가.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할 줄 모르는” 외로운 남자에 관한 시나리오 <사랑의 이름으로>(가제)의 초고는 그렇게 완성됐고, 그는 그걸 품고서 새 둥지 LJ필름의 문을 두드렸다. LJ필름의 이승재 대표와 함께 본격적인 상업영화로는 처음인 시나리오를 놓고 “내 것을 얼마나 버리고 또 얼마나 취할 것인지”를 고심했던 그는 5월 말 크랭크인을 준비하고 있다.

키워드

열정, 믿음, 순애보

문 감독은 외로운 40대 남자의 러브스토리라고 해서 ‘낡은 골목길, 추레한 여관방, 쓸쓸한 바닷가’만을 미리 떠올리진 말라고 말한다. “사랑으로 치유가, 그리고 구원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그가 이 ‘판타지’를 만드는 진짜 목적이기 때문이다. 문 감독에 따르면, 뒤늦게 발견한 출구이기에 극중 인물들은 위기를 맞지만, 영화는 “열정과 믿음의 순애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국 증명해 보일 것이다. “상처받은 영혼들은 서로의 몸을 핥는 행위를 통해 상대를 치유하고 구원한다.” 망각과 도피를 통해 치유와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안나와 그의 일행이 벌이는 로드무비 <나비>와 일견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영화학교에 가기 전 관객으로서 내가 영화에서 느꼈던 충족감 같은 게 있다. 외롭고, 울고 싶고, 외치고 싶고, 껴안고 싶고 그럴 때마다 영화가 내게 해줬던 것들. 이번 영화가 관객의 그런 결핍을 채워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정적인 의미의 관념은 걷어내고 직접적으로 감정이 전해지도록 할 것이다. 일례로 극중 인물들은 ‘사랑합니다, 사랑해요’라고 에두르지 않고 말한다.”

스토리

사랑에 목숨거는 현대판 돈키호테

상관의 비리를 수사하다 형준은 지방 경찰서로 전출된다. 그로부터 7년 뒤. 열혈 강력계 형사 형준은 잠복근무 중 복권을 긁다 반장에게 걸려 타박이나 듣는 처지로 전락해 있다. 술에 취한 날이면 그는 이혼한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데 매번 핀잔만 얻어 듣는다. 그의 곁엔 생사고락을 같이한 피붙이 같은 후배 박 형사가 전부다. 어느 날, 형준은 아내를 폭행한 혐의로 정환을 조사한다. 3선 국회의원의 아들인 정환은 그러나 쉽게 풀려난다. 높으신 분을 몰라봤다는 이유로 형준과 박 형사는 외려 추궁을 당한다. 형준은 얼마 뒤 정환의 아내 윤희의 목숨을 우연히 구해주게 된다. 서로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두 사람. 서로의 흉터와 피멍을 어르고 달래주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만 이를 알아챈 정환과 그의 수족인 비리경찰 강 형사의 개입으로 형준과 윤희의 사랑은 파국의 위험에 빠진다.

영화 속 형준에게선 문 감독이 “매일 일기 쓰듯 수십번 돌려봤다던” <파이란>의 강재와 <공공의 적>의 철중이 겹친다. 그러나 문 감독은 중세 로망의 주인공이었던 기사들을 들어 캐릭터를 설명한다. “이런 거다. 한때 용맹했으나 지금은 주정뱅이가 되어 있는 늙은 기사가 있다. 어느 나른한 봄날에 황금색 마차가 숲을 지나는데, 기사는 기네비아 공주 같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된다. 그녀의 슬픈 눈빛을 잊을 수 없는 기사는 그녀가 첨탑에 갇히게 됐다는 사실을 접하고 녹슬고 반쯤 부러진 칼을 빼들고 공주를 구하러 간다.” <사랑의 이름으로>의 형준은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무모한 현대판 돈키호테다. “사실 내 영화는 줄거리만 보면 모두 통속적이었다. 외로운 남자가 타지에서 태권도를 통해 가족을 느끼게 되는 <이방인>도 따지고보면 디즈니 가족영화랑 다르지 않다. 얼마 전에 술 먹다 놓고 간 시나리오를 구멍가게 아저씨가 읽었는데 ‘재밌게 봤다’며 ‘명대사를 좀 만들어 넣어라’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주문을 하더라. 이런 것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프로덕션 포인트

감정

5년 전, 그와 함께 한없이 가벼운 디지털카메라의 꽁지를 따라다니며 죽도록 고생했던 <나비> 스탭들이 다시 모인다. 권혁준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고, 이재혁이 조명을 책임진다. <나비>에서 운전사 역을 맡아 안나를 동행했던 장현성도 함께한다. “작업이 끝난 뒤에도 자주 만났다. 그동안의 내 변화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스탭들이기도 하다. 충무로에서 작업하면서 이들의 노하우도 굉장히 축적됐다. 본인들도 이 시나리오를 보고 크리에이티브한 접근이 가능하겠다고 욕심을 보이고 있다.” 현재 남녀 배우는 미정인 상태다. 문 감독은 두 남녀 배우가 우는 장면이 관건이라면서, “울 때 밉지 않고 웃을 때 해맑고 싸울 때 잘 싸우고 무엇보다 관객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배우와 이야기 중”이니 조금 기다려달라고 한다. “픽사의 애니메이션과 존 맥티어넌의 <다이 하드>를 수없이 보고 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에선 선명한 캐릭터를, <다이 하드>에선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카메라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다. 관능적인 탱고 선율이 얹혀질 이번 영화는 <나비>와는 카메라를 세우는 방식이 다르다. 전작은 논문 같은 시나리오가 생기있는 배우들을 만나 연애하는 감정으로 찍었던 영화이고, 그래서 카메라는 배우를 따라가는 식이었다. 이번에는 내 감정에 따라 카메라를 배치한다. 그만큼 배우들이 최선의 상황에서 연기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도 내 숙제 중 하나다.” 언뜻 보면 통속적인 내용의 신파극, 과연 문 감독은 대중적인 어법에만 충실한 영화로 만들 것인가. “아직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술술 넘어가되 모든 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같은 장면이라도 다른 영화에서와는 다른 기능, 다른 감정을 갖는 장면 연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틈은 프로젝트가 좀더 진행되면 조금씩 보일 것 같다.”

한마디로

“관객이 극장을 나설 때 모두 ‘아, 사랑하고 싶다’고 되뇌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얼마 전 종영된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보고 많이 울었는데, 보는 이들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또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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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홍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