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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신작 이야기 [3] - 민규동 감독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5-02-28

민규동 감독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민규동 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그때, 혼자 남겨진 느낌이 묘했어요.”

민규동 감독은 3년 전 <씨네21>에 실린 ‘네 감독의 신작 프로젝트’ 기사를 그렇게 회상했다. 당시 그는, 몽골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아내를 찾아나선 바이올린 주자의 이야기 <솔롱고스>를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었다. 같은 지면에 소개된 프로젝트는 뒷날 <바람난 가족>으로 제목이 바뀐 임상수 감독의 <마지막 연애의 상상>과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었다. 세개의 기획은 고치를 벗고 스크린으로 보란 듯이 날아올랐지만, <솔롱고스>만은 종이 위에 외로이 남았다. 그뒤로도 오랫동안 민규동 감독은 많은 이야기를 썼다. 미처 계발되지 않은 자신을 탐색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김태용 감독과 공동연출한 기묘하게 아름다운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제작자를 만나는 그의 발목에 매달린 무거운 꼬리표였다. “그 영화는 날쌘 말처럼 나를 따라붙기도 하고 무거운 갑옷처럼 내리누르기도 했다.” 다음달, 다음주의 크랭크인을 수년간 기다리면서 민규동 감독은 영화가 문득 자신의 사이비종교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임박한 메시아의 등장과 구원을 믿고 기다리다가 그의 등장을 의심하고 혹 등장하더라도 별다른 인상적인 구원의 순간이 아니면 어떡할까 근심하는.”

준비의 긴장으로 신경의 끝을 갈아세우다 맥이 풀리는 일이 반복되어서일까? 2003년 겨울 민규동 감독은 몹시 앓았다. 스스로 기획하고 쓴 영화가 아니어도 어쨌든 한 영화를 만들면서 그 안에서 앓고 싶다, 그래서 치료받고 싶다는 희망을 품을 즈음 두사부필름(대표 윤제균, 허태구)에서 유성협 작가와 제정훈 기획이사가 원안을 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제안받았다. “<매그놀리아> 같은 기획”이라는 말이 귓전에 오래 머물렀다. 일곱쌍의 인물이 7일 동안 경험하는 일곱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환(環)으로 엮은 <내 생애…>는 선 굵은 코미디에 주력해온 제작사로서도, 집약된 공간과 인물로 강렬한 화법을 고민해온 민규동 감독에게도 실험이다. 시나리오를 고쳐 쓰며 캐릭터의 그물망을 손질하고 많은 배역을 캐스팅하면서 그는 “마치 지금까지 여러 작품을 통해 한 사람씩 만났어야 할 배우들과 한꺼번에 조우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긴 침묵과 허기를 달래기라도 하듯이 다수의 인물과 에피소드가 한꺼번에 살을 뻗는 일곱 색깔 이야기. <내 생애…>는 민규동 감독의 새로운 솔롱고스(무지개)다.

키워드

기적, 천진함

<내 생애…>의 시나리오는 “그래 어떻든 간에 인생은 좋은 것이다”라는 괴테의 말로 시작해 “몇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라는 니체의 경구로 끝난다. 민규동 감독은 그의 영화가 이 두개의 ‘거짓말’ 사이에서 만드는 또 하나의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내 생애…>가 원래 점찍었다가 포기한 제목은 <달콤한 인생>. 여기서 ‘달콤한 인생’의 앞에는 보이지 않는 괄호 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생략돼 있다. “인생이 끔찍하다는 것은 진리다. 이 영화의 내용은 태도와 시선을 바꾸어 가질 수 있는 잠깐 동안의 행복을 말한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아름다운.” 그래서 <내 생애…>는 슬픈 영화다. 그리고 영화의 키워드는 기적, 그리고 천진함이다. 해피엔딩은 당위적 결과나 당연한 선물로 도래하는 게 아니라 천진한 기적처럼 현현한다. 그래서 실제로 해피엔딩이 얼마나 일어나기 어려운 일인지 헤아리게 한다. 민규동 감독이 시나리오 파일 표지에 넣은 그림은 마르크 샤갈의 <에펠탑의 신랑과 신부>. 중력을 잊고 날아오르는 그들은 <내 생애…>의 등장인물 중 가장 로맨틱하면서도 가장 반로맨스적인 현실에 처한 커플 창후와 선애의 모습이기도 하다.

스토리

일곱 색깔 사랑 이야기

멀티플렉스 틈에서 퇴락해가는 낡은 극장이 하나 있다. <내 생애…>는 그곳에서 한번쯤 즐거운 오후를 보냈을 이 거리 사람들의 이야기다. 재건축 압력을 받고 있는 곽씨네하우스의 곽 회장(주현)은 매점을 하는 중년의 배우지망생 오 여인을 좋아한다. 극장을 찾은 외판원 창후(임창정)는 선애와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가난에 쫓기는 새신랑. 그에게 신용카드 대금 독촉전화를 거는 성원(김수로)은 전직 농구선수다. 그는 게임을 통해 어린이돕기 성금을 모금하는 TV프로그램으로부터, 진아라는 8살 환자가 그를 지목했다는 연락을 받는데 병동에서 만난 소녀는 그를 아빠라고 부른다. 진아의 남자친구 지석은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외로움을 탄다. 지석의 아버지 조 사장(천호진)은 유능하고 부유한 연예기획사장이지만 사람도 삶도 믿지 않는다. 조 사장 부자는 세심한 청년 태현을 가정부로 맞이한다. 혼자 사랑하다 지쳐 떠난 아내 유정(엄정화)은 씩씩한 정신과 의사. 토론 프로그램에서 만난 중년의 숫총각 나 형사(황정민)와 티격태격 정을 쌓는다. 그 와중에 유정의 병동에는 두명의 자살미수자가 실려온다. 조 사장에게 퇴출된 가수 정훈(정경호)과 수녀 서원을 앞둔 수경이 그들. 수경은 정훈을 짝사랑해왔다.

현란한 잽을 교환하는 유정과 나 형사 커플이 로맨틱코미디의 구조를 지탱하긴 하지만, 감독은 <내 생애…>를 모두가 조연인 영화라고 표현한다. 모두가 주연이 아니고? “같이 어울려 있어야만 비로소 그림이 보이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직소 퍼즐처럼 완성된 그림을 들여다보면 퍼즐 조각들의 테두리와 균열이 떠오르고, 그것 자체가 하나의 미감이 되는 영화다.” 본디 영화 속 일주일은 12월25일부터 31일까지였다. 이른바 할리우드 크리스마스 영화들이 정점에 달하는 시간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하고 싶었고, 희망과 행복의 심상으로 넘쳐나는 외부 세계와 인물들의 목마름이 이룰 대조가 욕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촬영 시기가 봄으로 미뤄지면서 영화 속 시간은 일년 중 언제나 있는 일주일로 변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거리 냄새가 밴 이야기를 원하는 감독의 다른 욕심을 생각하면 아쉬워할 일만은 아니다. 하루도 한달도 아닌 일주일을 택한 것은 삶의 가장 작은 순환 단위이기 때문. 필름에 담는 시간은 7일이지만, 그 일주일이 숨쉬기 위해서는 뿌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감독과 연출부는 인물들의 인생 전사(前史)를 썼다. 감독 책상에는 “진아의 엄마는 어떻게 죽었을까?”라는 자문자답이 노란 메모지 위에서 고개를 외로 꼬고 있었다.

프로덕션 포인트

대사, 음악

민규동 감독의 초기 단편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되도록 널리 이야기를 전할 방법을 모색하는 영화가 아니라 (감식자를 기다리며) 암호 안에 이야기를 감추는 방법에 골몰하는 영화였다. 스토리 외의 요소들이 또 하나의 스토리를 전하는 복화술의 영화였다.

반면 140신으로 설계된 <내 생애…>는 매 장면이 대사로 꽉 차 있다. 이야기 전달과 성격묘사를 대사에 크게 의존하는 이 영화는 민규동 감독에게 도전이다. “편안히 이야기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은 큰 재능과 평정심을 요한다. 마틴 스코시즈나 우디 앨런 영화를 보면 대사가 무척 많은데도 그 말들이 이미지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소화된다. 물론 그야말로 대가들의 경지지만.” 감독의 또 다른 희망사항은 음악이 엔터테이너 노릇을 맡아줬으면 하는 것이다. 타피스트리 같은 영화 성격에 맞게 장르는 한정하지 않을 생각. 창작곡이건 기존 곡의 선곡이건 이질적 음악들이 잼 세션을 벌이며 관객의 흥을 돋우길 바라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이유는 무한히 많지만 그중 하나라도 영화 속에 표현되고 이해받는다면 만족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출발해서 서로 다른 대답이 하나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정경을 보고 싶다.” 지금 민규동 감독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내 생애…>의 ‘서시’로 쓰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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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홍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