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아키하바라는 서울의 용산 전자상가와도 자주 비교되곤 하는 ‘전자 제품의 천국’이다. 세계 최첨단의 제품들이 늘어서 있는 화려한 빌딩들을 돌아다니다보면, 누구든 그 이름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상가들 사이의 좁은 골목과 대형 빌딩의 어지러운 계단을 헤집고 들어가다보면, 이곳의 또 다른 이름이 떠오른다. 오타쿠의 파라다이스. 그렇다. 이곳은 지구라는 행성 곳곳에 흩어져 있는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마니아들의 예루살렘인 것이다.
동인지 계열의 미소년 캐릭터 소타군은 명랑 쾌활하고 인덕도 좋은 고등학생이다. 친구도 많고, 학교생활도 즐겁게 하고, 예쁜 여자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두로부터 숨겨야 할 비밀이 있다. 그것은 그가 초등학생용 애니메이션 캐릭터 ‘빠삐코’에 대한 애호의 감정을 숭배의 수준으로 간직하고 있는 제대로 된 오타쿠라는 사실이다. 아키하바라 전철역에 내리기만 해도 행복감에 빠져드는 소년, 그러나 ‘오타쿠 왕국’이라는 수상한 가게에 들어선 뒤 그의 오타쿠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어쩐지 어둠침침하게만 느껴지는 오타쿠들. 그들의 터전인 만화에서도 흔히 뚱뚱한 몸매, 도수 높은 안경, 현실과 유리된 폐인 생활, 탐닉을 넘어 범죄로까지 이어지는 괴팍한 취향으로 즐겨 그려져왔다. 그러나 산뜻한 미소년 캐릭터들이 스스로 오타쿠임을 커밍아웃하고 있는 이 만화는 ‘오타쿠도 다 같은 오타쿠가 아니다’라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준다. 아이돌 오타쿠는 실존하지 않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오타쿠를 경멸하고, 아케이드 오타쿠는 자신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얄팍한 오타쿠에게 공상의 스틱으로 필살기를 날린다. 말하고 보니, 오타쿠는 역시 오타쿠였다.
오타쿠를 그린 만화지만, 오타쿠가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다. 특히 ‘오타쿠 왕국’의 점장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다채로운 대결 구도가 흥미진진하다. 2D의 미소녀(캐릭터 빠삐코)를 애호하면서 3D의 미소녀(실제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타, 대학 시절부터의 오래 원한으로 무의미한 대결을 계속하는 ‘오타쿠 왕국’ 점장과 ‘만화 동굴’ 점장…. 이처럼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난로는 있다. 똑같이 상큼한 미소년이면서 알고보니 빠삐코의 애호가인 켄지를 만나서 행복하다. ‘아아, 2차원 알라뷰. 오타쿠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