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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14년만의 외출, <여자, 정혜>의 김지수

무심한 표정으로 세상을 건너는 여자가 있다. 참혹한 기억을 품고도 그는 식물처럼 덤덤하기만 하다. 거센 세상의 물살에도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은 씩씩함이 아니라 포기와 체념이다. 머리 위로 부는 바람에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주제에, 그 무엇을 향해서도 손을 뻗으려 하지 않는 단호함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다. 처음엔 그런 정혜가 안쓰럽다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답답함으로 화가 치밀 지경이다. 스스로를 끝없이 감춤으로써 생존을 향한 본능을 불태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의외로 많을 수 있겠지만, 끝내 눈에 띄지는 않게 마련. 그러니까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영화 <여자, 정혜>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처음부터 감수해야 했다. 만든 감독이나, 출연한 배우나 영화 속 정혜처럼 한없이 외로워질 각오를 해야만 한다. 고집스런 신인감독 이윤기의 행보에 기꺼이 동참한 용감한 얼굴이 궁금해진다. 이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궁금함. 정혜의 삶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런 인물을 옮긴 영화의 방식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 주인공은 김지수. 동명이인이 아니다. 한결같은 얼굴로 브라운관을 지켜온 바로 그 김지수가 맞다. 감독은 말한다. 평범하고 특별한 정혜 역으로 대중적 이미지가 굳어진 유명한 ‘영화’배우를 캐스팅할 수는 없었지만 안정적인 연기력이 필요했기에 신인 또한 적합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떠올린 얼굴이 김지수였다는 그 설명은 매우 명확하고 이해도 가능하다. SBS 탤런트 공채로 선발된 뒤 14년째 TV에 머물렀던 그에게선, 사실 배우로 불리고 싶다는 야심이 안 느껴졌다. 아주 오랫동안 일상적으로 그를 봐왔던 시청자의 입장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투지를 불태우며 도전을 거듭하는 익숙한 인물과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정혜와 김지수가 잘 어울렸던 건 사실이다. 그만큼 그간의 김지수는 영화 속 정혜만큼이나 욕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 얼굴에 대한 궁금함은, 영화 외적으로 봤을 때 무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선택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첫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어요.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함부로 선택할 수가 없다면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라니, 무슨 말인가. 그의 말처럼 <여자, 정혜>에는 함께 묻어갈 수 있는 상대배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내러티브도 없다.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어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연기력을 선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세울 것이라곤 유난히 아담한 제작 규모 정도인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 무슨 대단한 전략이 될 수 있단 말인지 의아해진다. 지난 세월 내내 하고 싶은 영화를 기다려왔다는 그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사람들이 김지수는 영화에 관심이 없다고 지레짐작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좋은 시나리오도 받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영화 출연을 결심하지 않은 것뿐이란 얘기다.

그런 그가 선택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정말 독특하다. 대사도 별로 없이 정혜의 일상적인 행동만 묘사하면서, 인물의 감정상태에 대해서는 지극히 인색하기만 하다. 가장 후한 묘사라고 들 만한 것이 ‘흔들리는 정혜의 표정’ 정도여서 누가 봐도 배우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이 역력하다. “이걸 한다면 영화가 나를 굉장히 괴롭힐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어요. 근데 나는 자꾸만 끌리고 있었죠. 영화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정혜에게 느꼈던 연민이었던 것 같아요.” 굳이 설명하자면 머리가 아닌 마음을 앞세운다는 것이 그의 전략 아니었을까.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택한 인물을 제대로 표현해보겠다는 그 마음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정혜와의 동거는 지옥이었다. 영화의 99%에 등장하는 그를 시종일관 핸드헬드로 집요하게 따라붙는 카메라는 배우의 육체를 끊임없이 옭아맸다. “심할 때는 카메라가 내 1m 앞에 있었어요. 카메라와 내가 묶인 것처럼, 답답했죠.” 그러나 정작 그를 괴롭게 만든 것은 연민을 느꼈던 정혜를 향한 미움이었다. 김지수는 “내가 연기하는 인물을 이렇게 미워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어떤 날은 정혜가 너무너무 불쌍하다가 어떤 날은 끔찍하게 싫은 거예요. 제일 속상했던 건 정혜가 끝없이 고립돼 있었다는 점. 정혜는 가장 가까웠던 엄마한테도 마음을 열지 못했거든요. 내가 연기하는 인물을 그렇게 미워한다는 게 또 너무 괴롭고….” 걸어다니고, 집 안을 청소하고, 직장에서 일상업무를 보는 정혜의 일상을 연기하다가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지금 이게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이 없어 순식간에 두려움에 휩싸이기를 반복했다. 실제로 그는 영화의 마지막, 정혜가 자신에게 지옥을 소개한 고모부를 찌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는 순간이나 화장실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 자신이 마음에 뒀던 남자가 데이트 신청을 해오는 장면은 오히려 쉬웠다고 말한다. 정말 어려웠던 건 지독하게 무표정한 정혜의 평범한 행동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잔잔한 일상의 어느 구석에선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 정혜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불안하고 답답했다.

“첫 영화라고 해서 특별히 열심히 했던 건 아니었어요.” <여자, 정혜>에서 김지수는 목숨을 건 연기를 펼치지 않았다. 사실 ‘센’ 연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괴로웠을지도 모르겠다. 카메라에 붙들려, 정혜를 향한 애증에 시달린 그 시간은 돌이키고 싶지도 않다. 그는 기술시사 때 완성된 영화를 처음 본 이후,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김지수는 그렇게 정혜와 함께 한고비를 넘었지만, 정혜의 그늘은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갈 것이다. 깊은 곳에 지옥을 감추고도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정혜, 익숙한 작업을 뿌리치고 의연하게 쉽지 않은 길을 택한 김지수가 닮은 것은 딱 여기까지다. 한결 조심스럽고도 씩씩하게 다음 발걸음을 준비하는 그는 제법 먼길을 앞두고 있다. 스크린은 더이상 그에게 외유의 대상이 아닐 예정이다. “최근 본 영화 중에서는 <그때 그 사람들>의 한석규 선배님이 연기한 인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한국영화에 그런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억울하고 남자배우들이 많이 부러워요.”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지수는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부러워하고, 욕심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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