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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 파행 그 이후
사진 오계옥이영진 2005-02-23

“이번 결정은 우리를 격분케 한다”

“당신의 결정은 부천뿐 아니라 국제 영화계에서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에도 크나큰 실수를 한 것입니다.” 지난해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됐던 단편영화 <포르노 설전>의 감독 티 아더 코텀이 홍건표 부천시장에게 보낸 메일의 한 대목이다.

부천영화제를 파행으로 몰아넣은 부천시를 향해, 항의서한이 바다 건너 불화살처럼 날아들고 있다. 1월25일 김홍준 전 집행위원장과 함께 영화제를 이끌었던 프로그래머들과 스탭들이 사실상 해고되자, 지난해 말 부천시가 김 전 집행위원장을 해촉한 것을 시작으로 점화됐던 국내외 분노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부천시와 전 프로그래머들에게 전달돼온 해외 서신만 100여통. 이들은 지자체가 영화제의 자율성을 빼앗은 이번 사건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이같은 일이 사실이라면 “함께 싸우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부천영화제가 일궈낸 성과를 언급하며 이번 일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시간의 도망자들>이라는 영화를 들고 지난해 부천을 찾은 스페인 감독 엔리크 폴치는 “게스트로 참가했던 나와 동료들은 부천의 스탭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부천영화제가) 서구 사람들이 동양의 영화계와 소통할 수 있는 양질의 통로였다”고 적었다. 스웨덴판타스티카페스티벌 프로그래머인 크리스티앙 홀먼은 “이번 결정은 충격적이고, 졸렬하고, 우리를 격분케 했다”면서 “EFFFF가 부천시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럽판타스틱영화제연합(EFFFF)의 경우, 아시아에서 유일한 회원 자격을 갖고 있는 부천영화제의 위상을 재고하겠다는 강한 메세지를 보냈다. EFFFF의 의장인 올리비에 뮐러는 부천 시장에게 “부천영화제가 우리 조직의 회원으로서 계속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즉각적인 재검토가 이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무엇보다 부천시가 그동안 부천영화제를 만들어온 집행위원장과 스탭들을 왜 해임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영화평론가인 토니 레인즈는 “(부천)영화제는 부천 시민에게 문화적인 자산을 공급할 뿐 아니라 서울의 수많은 시민과 그 몇배나 되는 세계인을 매료시켰다”면서 “그 어떤 행사보다 영화제 때문에 부천이라는 도시는 국제적인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암스테르담국제영화제 얀 둔스 집행위원장도 “지금까지의 모든 성과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중략)… 제발 옳은 선택을 하십시오!”라고 충고했다.

신임 정홍택 집행위원장이 돌연 사퇴한 뒤, 집행위원장 없이 영화제를 치르겠다며 얼마 전 정초신 감독을 프로그래머로 선임한 부천시는 해외에서 쏟아지는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대신 베를린영화제에 자비를 들여 참석한 김영덕 전 프로그래머가 해외 영화인들에게 부천영화제 사태에 관한 왜곡된 정보를 흘리고 있다며 괘씸해하고 있다. 부천영화제 조직위원회는 2월16일, 김 전 프로그래머가 해외 영화인들의 올해 부천영화제 참석을 가로막고 있다며 이와 관련해 논의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부천의 싸움, 이제 시작이다

2003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자원활동가 발대식

부천시를 향한 국내 영화계의 비난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거세지고 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회장 김형준)는 단체로서는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이어 올해 영화제 행사에 작품 출품 및 관련 행사 참가를 거부하기로 했다. 제협 내부에선 한때 김홍준 전 집행위원장의 해촉 이후 “영화제 정상화를 위한 노력에는 힘을 기울이되 협회 차원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좀더 두고보자”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부천시가 지난 1월25일 잔류를 원했던 프로그래머와 스탭들과의 재계약마저 거부하자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2월1일 운영위원회를 열어 이같이 뜻을 모았다.

제협의 이같은 결정은 예정됐던 결과. 제협 회원인 55명의 한국영화 제작자 중 38명은 이미 개인 자격으로 부천영화제 출품 거부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제협의 김지숙 사무국장은 “부천 사태와 관련해선 여러 차례 회원사들에 공지를 한 만큼 13인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의 결정이라고 할지라도 내부적으로 충분히 논의가 된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디렉터스 컷을 중심으로 주요 감독과 배우들이 일찌감치 부천 보이콧 선언을 내놓은 가운데 제협이 적극적인 ‘안티 부천’ 대열에 동참함에 따라 올해 영화제는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부천시를 상대로 한 법적 대응도 조만간 수면 위에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영화인회의는 김홍준 전 집행위원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영화인회의 유창서 사무국장은 “해촉건의 경우 부천시를 상대로 무효 소송을 검토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작성된 안을 바탕으로 조만간 김 전 집행위원장과 만나 최종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영화제 인사위원회가 김영덕, 김도혜 프로그래머와 손소영 프로그래밍 팀장과의 재계약을 거부한 것 또한 ‘명백한 부당해고’라고 보고, 법정 싸움을 시작할 예정이다.

제2의 부천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한 국내 영화제 관계자들의 발걸음도 분주해지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광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및 스탭들은 최근 영화계 인사들이 제안한 영화제 협의체 구성에 관한 회의에 동참해서 지자체의 압력에서 영화제가 자율성을 잃지 않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함께 모색했다. 부산영화제쪽은 일정상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들과 행보를 같이 하기로 한 상태. 이들은 3월 초에 심포지엄을 갖고 영화제 협의체 구성과 지자체와 적절한 거리두기 방안에 관해 논의하기로 했다. 부천영화제 정상화를 위한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