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 소중한 친구들의 이야기”
<샌프란시스코 블루스>의 허인 감독 인터뷰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시절 졸업 작품 <Laundromat Queen>과 영상원 전문사 과정 실습 작품 <여름고백> 등에서 남장 여자와 이민자, 장애인 등 소수자를 따스한 시선으로 보듬어 안았던 허인 감독. 생생한 캐릭터가 빛나는 <샌프란시스코 블루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팍팍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소중한 희망을 잃지 않는 인물들이다. 쉽지 않은 낙관을 통해 거친 현실을 개척하려는 태도가 미덕인 이 영화는 감독 주변의 소중한 친구들에게서 비롯됐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적 ‘즐거움’으로, 이는 영화제작의 구체적인 환경뿐 아니라 만들어진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까지도 고려한 것이다. 연출했던 모든 영화현장을 기꺼이 즐거웠다고 회고하는 그는, <샌프란시스코 블루스>의 제작 역시 마음에 맞는 배우, 스탭과 함께 유쾌한 경험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생생한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모두 실제 모델이 있나.
=범식은 내 게이친구가 모델이다. 그는 미국에 가기 위해 위장결혼을 꿈꿨고, 이후에는 타이행을 계획했다. 그런 친구를 특별하게 여기는 뚱뚱한 여자 구슬은 나를 모델로 한 것이고, 언제나 기복이 심한 구슬에 비해 한결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는 친구 희준 역시 실제 모델이 있다. 이렇게 내가 아는 인물들을 반영하다보니까 캐릭터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 것 같다. 배우들에게도 실제 인물들을 소개시켜주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전에는 모델을 직접 연기자로 카메라 앞에 세우기도 했는데, 이번엔 결정적으로 내가 연기를 할 수도 없으니까, 모든 인물은 배우를 새로 캐스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 유학 시절 졸업영화였던 <Laundromat Queen>은 어떤 영화인가.
=세탁소에서 옷을 수선하는 한국인 여성과 드랙퀸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소수자들이 서로를 위로하면서 희망을 얻는 이야기로, 두 주인공이 옥상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끝난다. 한겨울에 다들 고생이 많았지만, 다국적 스탭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하게 찍었다.
-기획서에서 “노래방 장면에서 판타지를 살리겠다”고 했다. 평소 판타지적인 화법에 관심이 많았나.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색감이나 카메라의 움직임처럼 무언가를 덧붙이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나는 반짝거리는 것들, 필터도 몽환적이고 빛나는 효과를 줄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웃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면서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모던타임즈>의 결말을 염두한 것이었다. 그처럼 역경을 겪은 사람들이 곧바로 일어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일련의 과정을 영화적으로 압축하는 것 역시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던타임즈>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있었나.
=외할머니가 영화광이셨다. 초등학교 때 할머니께서 자막도 없는 <모던타임즈> 비디오 테이프를 권해주셨고, 이후에 코아아트홀에서 그 영화가 개봉했을 땐 할머니 손을 잡고 극장을 찾기도 했는데, 정말로 재밌게 본 영화 중 하나였다. 외할머니가 돌아가기 직전인 지난해 하반기까지 한달에 한번꼴로 함께 영화관람을 했다. 이 영화의 엔딩을 놓고 고민할 때는 할머니와 함께 봤던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는데, 그때 <모던타임즈>가 생각났다. 쉽지 않은 장면이 되겠지만 공들여 찍고 싶다.
<샌프란시스코 블루스> 시놉시스
노래방에만 가면 <샌프란시스코>라는 가요를 부르는 범식은, 남자들끼리 손을 잡고 다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샌프란시스코행을 꿈꾸는 순진한 게이청년이다. 뚱뚱한 체구가 귀엽게 느껴지는 그의 친구 구슬은 언제나 노래방에서 마우스피스만 물고, 색소폰을 연주하는 시늉을 한다. 1천만원을 내면 미국인과 위장결혼을 해서, 샌프란시스코에 갈 수 있음을 알게 된 범식은, 구슬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장만한 색소폰을 들고 사라진다. 몇달 뒤 미국행을 좌절당한 범식은 색소폰 대신 휴대폰을 들고 구슬 앞에 나타난다. 언제나처럼 옥상 위에서 소주병을 까는 범식과 구슬. 금문교보다는 못해도 원효대교도 그럴싸하지 않냐고, 열심히 돈을 모아 샌프란시스코 대신 방콕에라도 가겠다며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정겹다.
“불륜은 인간의 솔직함을 표현하는 좋은 소재”
<처용의 다도>의 정용주 감독 인터뷰
너무나 당연시되는 덕목, 효(孝)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 SF <심청이 팔려가기 전날밤>, 형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아우가 형과도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반전을 가지고 있는 <멀미> 등의 영화를 만들었던 정용주 감독의 일관된 관심사는, “인간에 대한 탐구”. <처용의 다도>에서 시간여행이라는 판타지적 장치를 사용한 것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웬만해선 깨닫기 힘든 “본인의 잘못을 대면”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처용의 다도> 시나리오를 2년의 시간차를 두고 완성한 그는, 애증과 용서를 통해 성장을 경험하고 비극적 결말을 피하게 된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처용의 다도>는 반드시 결혼한 커플이 아니어도 가능한 이야기다.
=사회적으로 용납받지 못하는, 그러나 감정 그 자체로는 자연스러운 불륜은, 인간의 솔직함을 표현하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주인공이 애초에 품었던 죽이고 싶은 분노와 증오는, 불륜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선재 역으로 이수아를 캐스팅했다. 그의 전작으로 미루어 바람피우는 부인의 이미지가 너무 쉽게 연상되진 않을까.
=실제로 만났더니, 단정하고 조신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첫인상부터 자유분방한 느낌의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진 않았다. 깊은 외로움을 느낄 때 자신을 보살펴본 사람에게 마음이 끌렸을 뿐, 선재가 처음부터 영민을 배신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기획배경에서 “자신의 잘못은 빨리 망각하고 타인의 잘못은 벌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습성”을 언급했다. 시나리오에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있나.
=연애할 때 누구나 한번쯤 상대방의 메일이나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괜스레 의심하곤 하지 않나. 그런 경우 대부분 본인의 잘못은 생각하지 못한다. 사실 이 시나리오는 2년 전 썼던 이야기를 다시 수정한 것인데, 당시에는 나를 배신한 여자친구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지, 영민이 선재를 끝내 독살하고 죽어가는 선재를 지켜보는 것이 결말이었다. 그런데 2년 뒤 다시 읽어보니 나의 과거가 떠오르면서, 용서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평소 다도에 관심이 많았나.
=몇년 전 경주 백륜사에서 다도를 처음 접했다. 이후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인터넷 동호회 같은 것을 통해 다도를 익히려고 애를 쓰긴 했다. 보통 다도라고 하면 정화를 떠올리지만 다도의 정점은, 용서에 있다. 관용과 용서라는 처용 설화의 주제와도 잘 어울리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의 비주얼 컨셉은 어떻게 차별화되나.
=과거는 실제보다 더 리얼한 톤으로 그리려 한다. 원색도 많고 광각렌즈도 많이 사용하는 식이다. 개인의 추한 과거를 드러낼 수 있도록 날선 화면을 만들고 싶다. 현재는 그와 대비될 수 있도록 망원렌즈도 많이 사용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다. 현실이지만 환상처럼 부드러운 느낌으로. 전체적으로는 녹차를 연상시키는 그린과 회색톤을 강조할 것이다. 극영화에서 그린톤을 강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CF나 뮤직비디오에서는 많이 시도됐다. <슬픈 연가> 등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던 최범수 촬영감독과 더욱 많은 의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