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가 ‘백인의 육체’ 컨트리에 ‘흑인의 영혼’ R&B를 불어넣는 순간 록은 탄생한다. 레이 찰스가 신을 향해 부르던 가스펠에 첫사랑 델라(케리 워싱턴)를 향한 열정으로 써내려간 <I’ve got a woman>이 발표되면서 솔은 대중음악이라는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레이>는 레이의 생애를 순회공연처럼 떠도는 로드무비다. 영화가 시작되면 흙먼지가 날리는 고향의 정류장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컨트리, 가스펠, 솔, 재즈, 리듬&블루스를 자유자재로 가로지르고 탐험하는 레이 찰스의 음악적 여정도 그러하다. 레이는 언제나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난다. 그의 몸도 마음도 길 위를 거닌다.
대공황 시대 미국 남부 올바니에서 태어난 레이 찰스 로빈슨(제이미 폭스)은 동생 조지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으로 7살에 시력을 잃는다. 소작농이던 어머니 아레사(샤론 워런)는 충격적인 사고와 겹치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레이를 더욱 강인하게 키우고자 이를 악문다. “도움을 받기보다는 혼자 일어서야 했던” 그는 보컬 겸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당시 재즈의 본고장으로 손꼽히던 시애틀로 떠나 세션맨으로 첫 무대에 오르는 레이. 잭 로더데일과의 인연으로 스윙타임 레코드에서 처음 취입한 블루스 음반으로 무명에서는 벗어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그를 주위 사람들은 이용하려고만 든다. 솔로로 거듭나기 위해 뉴욕으로 발길을 돌리는 레이. 그의 앞에 애틀랜틱 레코드를 운영하는 평생의 은인 아멧과 제리가 나타난다. 그들과 함께 솔의 천재로 승승장구하던 레이는 1959년 메이저사 ABC레코드로 소속을 옮겨 새로운 음악에 도전한다. 1960년대는 음악가로서 레이 찰스가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밖으로는 인종차별, 안으로는 고질적인 약물 복용과 여자문제가 그를 괴롭힌다. 가족들과 오랜 동료들은 점점 그에게서 멀어지고, 사랑하던 마지는 약물 복용으로 불귀의 객이 된다. 1965년 캐나다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던 레이는 약물소지 혐의로 위기에 봉착한다.
연출자 테일러 핵포드가 레이 찰스와 영화화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이었다. <라밤바>로 음악영화에는 일가견이 있는 테일러 핵포드는 레이 찰스를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솔 마스터가 아닌 고비마다 사력을 다하는 인생의 도전자로 묘사한다. 레이 찰스가 마약문제에서 벗어나 재단을 설립해 불우한 사람들을 돕고 위대한 음악가로 각인되는 60년대 말 이후는 다뤄지지 않는 시간적 배경도 이를 뒷받침한다. 레이는 위대한 음악가, 탁월한 엔터테이너, 냉정한 비즈니스맨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절박함과 동생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죄의식이 뿌리깊게 자리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2차대전에 참전했다고 거짓말하거나 1달러로만 출연료를 달라는 꼼꼼함은 이런 생존전략에 다름 아니다. 실패를 경계하며 늘 준비하지만 매 순간을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아가는 레이는 히어로가 아닌 음악을 ‘꿈꾸는’ 그저 한 인간이다.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인 <Georgia on my mind>를 레이 찰스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하는 유장한 화면을 간단히 비춘 카메라는 악단이 아닌 오래된 팀 멤버인 색소폰 주자 얼간이와 코러스인 마지가 황당해하는 모습으로 신을 마무리한다. 레이는 자신의 음악세계로만 나아가고 친구들은 당황한다. 이처럼 <레이>는 영웅의 성공담이 아닌 어느 에고이스트의 치열한 예술가적 자화상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레이 찰스가 거머쥔 13개의 그래미와 76개의 베스트 싱글 앨범에 영화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누가 봐도 이 영화의 보석은 제이미 폭스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레이 찰스를 담은 다큐멘터리 장면과 사진은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에게 제이미 폭스가 얼마나 레이 찰스와 닮았고, 그를 완벽히 재현했는가를 재삼 상기시킬 것이다. 연주장면에서 제이미 폭스의 위력은 폭발한다. 피아노를 치는 손길, 관객을 향한 특유의 시선과 손짓, 두팔로 몸을 감싸는 답례의 제스처, 코러스와 주고받는 액션과 리액션 하나하나는 그가 얼마나 재능 넘치고 집념있는 배우인가를 강변한다. 물론 영화 속 노래들은 전부 레이 찰스의 음성으로 담겨 있다. 그것은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전언처럼 “누구도 레이 찰스처럼 노래할 수 없기에” 내려진 당연한 귀결이다.
<레이>는 레이 찰스의 위대한 업적보다는 어떤 고통의 시간과 생각의 강을 건너 그러한 음악이 나왔는 지를 침착하게 짚는 현명한 작품이다. 장르적으로 매끈하게 세공된 편집과 시퀀스들의 구성은 다소 보수적이지만 꼼꼼하게 영화의 방향을 제대로 떠받친다. 2004년 6월10일, 개봉을 지켜보지 못하고 영면한 레이 찰스도 지하에서 흡족해할 것 같다.
영화 속 레이 찰스의 주옥같은 명곡들
영혼의 아리아
<레이>에서 음악이 소개되는 시퀀스들은 부틀렉과 음반이 믹스된 뮤직비디오를 보는 느낌을 준다. 노래에 얽힌 사연과 감정들이 깔리면 곧바로 무대로 카메라가 넘어오는 구성은 레이 찰스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매우 친절하며 흥미롭다. 총 40여곡이 사용되었고 레이 찰스와 뉴올리언스 뮤지션들이 음악감독과 함께 작업했다. 대표적인 곡들을 소개한다.
<Mess around> 냇 킹 콜과 찰스 브라운의 아류로 먹고살던 레이 찰스의 색깔을 찾게 한 노래. 녹음 도중 친구이자 프로듀서인 아멧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레이의 첫 히트곡이다. 바람처럼 몰아치는 피아노의 스트라이드주법과 스윙풍의 보컬이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I’ve got a woman> 아내인 델라와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 1955년 R&B 차트 1위로 등극하면서 레이를 슈퍼스타로 등극시킨다. 솔의 효시를 알렸으며 교회에서는 신성모독의 논란을 불러 레이가 악마의 노래를 부르는 자로 매도되기도 했다.
<What’d I say> 레이 찰스가 클럽에서 연주 도중 약물 혹은 피곤 때문에 계약시간을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클럽주인이 항의하고 레퍼토리는 바닥난 상황. 레이는 멤버들에게 리듬만 연주하라고 지시한 뒤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레이 찰스의 대표곡 <What’d I say>의 탄생. 레이와 레이랫(레이 찰스와 함께하는 달콤한 음성의 여성 백보컬들)이 주고받는 섹시한 하모니가 압권.
<Georgia on my mind> 레이가 컨트리를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로 끌어들인 노래. 합창단과 관현악 오케스트라를 전격적으로 도입한 이 노래는 후일 조지아주 공식 주 주제가로 선정되지만, 레이가 인종차별에 항의하여 공연을 포기하고 조지아주에서 평생 공연금지를 명령받는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Hit the road Jack> 음악동료이자 연인이던 마지 헨드릭스와 싸운 뒤에 서로 으르렁거리며 불러대던 노래. 이후 마지는 솔로로 독립한다. 방송이나 광고 시그널로 자주 사용되어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흥겨운 곡.
<Unchain my heart> 국내에서는 다소 느끼한 조 카커 버전이 유명하지만, 레이 찰스의 원곡은 신나고 정열적이면서도 강약의 조절이 좀더 섬세하게 이루어진다. 브라스로 시작되는 인트로와 여성 백보컬들이 반복하는 후렴구의 하모니가 눈부시다.
<I can’t stop loving you> 레이 찰스가 만들어내는 컨트리와 R&B가 크로스오버의 결정판. 컨트리 음악에 열정적인 보컬을 담아 불후의 명곡을 만들어냈다. 1962년에 ABC레코드에서 발매된 명반 <Modern Sounds In Country and Western Music>의 대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