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부터 프랑스나 미국의 서점에 일본 만화가 그득하다. 일본 만화는 프랑스나 미국 만화의 고유한 출간 형태를 무시하고 일본식으로 출간되어 새로운 서가에 꼽힌다. 인기작들은 몇달의 시차로 소개될 지경이다. 이런 와중에 서구에서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다니구치 지로다. 우리에게는 낯선 다니구치 지로는 가장 문학적인 만화로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은 2권이다. 시공사의 <K>, 샘터사의 <열네살>. <K>는 절판되었고, <열네살>은 2004년에 출간되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다니구치 지로의 책은 작은 판형에 수십권씩 이어지는 시리즈가 아니라 넉넉한 크기에 한두권으로 끝나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산악 만화인 <K>를 제외하면 <열네살>이나 이번에 출간될 <아버지>(애니북스 펴냄)나 모두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는 일본의 30∼40대가 어느 날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니구치 지로가 빛나는 이유는 그 이야기들을 매우 정서적으로 담아낸다는 점이다. 독자에게 격한 감정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급격한 앵글 변화와 현란한 숏 구성을 쓰는 연재만화들에 비해 무미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모범적으로 변화하는 앵글은 다니구치 지로식 연출의 핵심이다.
집중선이나 역동감을 강조하는 극한 원근의 사용은 배제한 채 눈높이에서 풀어가는 이야기는 비유하자면 TV에서 방영하는 문예물처럼 느껴진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한구석 만만하지 않다. 일본 만화에서 흔히 보이는 몇 가지 스타일의 결합(예컨대 <슬램덩크>에서 중간중간 희화된 SD캐릭터가 등장하는 식의)은 배제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 우직하게 한 스타일로 밀어붙인 끈기라든지, 넓은 풍경에서 작은 소도구까지도 하나 왜곡됨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그려낸 섬세함이라든지, 현실과 과거를 넘나들며 풀어내는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이라든지 모든 것이 완벽할 만큼 잘 만들어졌다. 많은 돈을 들여 품새를 잘 뽑아낸 이른바 웰 메이드(Well-made, 도대체 이 용어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한 만화에서 발견되기 쉬운 영혼의 결핍감은 이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하나에서 열까지 꽉 찬 충만한 느낌의 만화가 바로 다니구치 지로의 <아버지>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열네살>이 주는 조금은 판타지한 설정 대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가 아버지와 나의 관계, 내가 보지 못한 아버지의 삶에 대해 감동적으로 풀어낸 이 만화를 이 땅의 아버지와 또 아버지가 될 모든 남성들에게 권한다. 이 만화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