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에 문을 열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단성사가 리모델링을 끝내고 재개관했다. 오래된 단성사만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빛을 선사한 터줏대감이 그곳에 있다. 국내 현역 최고령 영사기사 유영섭(69) 실장이 그 주인공. 구월산으로 유명한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1·4 후퇴 때 군산항으로 월남한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먼 인척의 소개로 영사 일을 시작한다. 군복무, 개인 사업, 리모델링으로 생긴 공백 6년을 제외하면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50년의 시간, 44년의 경력이 쌓이는 동안 그는 묵묵히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울고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같이 기뻐했다. 키노톤(Kinotone) 영사기가 신나게 돌아가는 흰 벽으로 새롭게 단장한 일터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 영사 일을 배울 때를 상기하자면.
=그때는 매우 엄격한 분위기였다. 일 자체도 그랬고. 사람들이 다들 좋아서 기분 나빴던 기억은 별로 없다. 8개월 정도 수업을 받은 뒤 본격적인 영사기사가 되었다.
-44년 동안 왜 단성사에만 있었는지, 다른 제의도 많았을 것 같은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디 감히 단성사에 일하는 사람을 다른 곳에서 오라가라… 이런 이야기 자체를 하지 못했다. 단일관으로는 최고 극장이라는 자부심도 대단했고. 리노베이션하는 동안도 꼬박꼬박 월급받으며 현장에 나와서 살펴봤다. 회사에 늘 감사한다.
-오랫동안 영사일 하면서 기억에 남는 실수.
=단 한번 서부영화 3, 4릴을 잘못 끼워 영화 내용이 뒤섞인 게 기억난다. 사실 그 실수도 내가 몸을 씻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릴을 누가 잘못 끼웠다. 어쨌든 기계를 내가 맡았으니까 내 잘못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극장 일로는 <겨울여자> <장군의 아들> <서편제>가 연이어 60만, 80만, 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던 일이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수다. 개인적으로는 영사실 선후배들과 어려운 사람들 도우러 다녔던 일. 그들 중 아쉽게도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지금 사용하는 영사기를 설명하자면.
=요즘은 전자동이 많은데 키노톤은 독일제로 반자동이다. 구조에 기어 같은 것들이 적고 체인형으로 이루어져 고장률이 매우 적다. 예전에는 손으로 다 하던 영사일이 현재는 대부분 프로그래밍화되어 있다.
-영사기사 지망생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마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즈음 부쩍 많아진 분위기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일이므로 사명감이 제일 중요하다. 한때는 1천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상황도 많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