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독일)는 생기 잃은 창백한 얼굴이 됐지만 그 얼굴의 절반마저 마비돼버렸다. 이러지 말라며 욕실 문을 두드리는 어린 딸을 두고 가스를 들이켜며 자살을 기도할 만큼 생의 의지를 잃었다. 어머니(=독일)를 이렇게 만든 건 나치(=전쟁)이며 남편(=남자, 아버지)이다. 이처럼 <독일, 창백한 어머니>가 나치와 남자를 고발하는 방식은 파스빈더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닮았으며, 어머니 곁에 있는 아이가 그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하며 창백해지는 모습은 폴커 슐뢴도르프의 <양철북>을 연상시킨다. 영화사적으로 정리하자면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전후 독일사회의 정체성을 회의적으로 짚었던 뉴저먼시네마의 맥락 위에 서 있는 셈이다.
비슷한 테마이지만 연출 기법은 앞선 두 작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브레히트적이다. 메시지는 훨씬 단단하고 선언적이며 이를 전달하는 스크린은 마치 연극무대를 고스란히 옮겨온 듯 소격효과를 노린다. 그게 너무 지나친 탓일까, 테마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한다기보다 아득한 거리감을 만들어놓는다.
어머니의 처녀 시절, 남자들은 나치 당원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란 이분법으로 분류됐다. 어머니는 당원이 되기를 꺼렸던 로맨티스트 남자와 행복한 결혼생활에 들어가지만 나치는 전쟁을 벌이고 그를 징집해간다. 그녀는 전쟁 중에 낳은 딸과 함께 고통스런 유랑을 시작한다. 폭격으로 무너진 집은 더이상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지 못하며 짐승이 돼버린 남자들로부터 보호해주지도 못한다. 전쟁과 나치가 괴로운 건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내를 닮은 여인을 총살하며 울부짖고 아내와의 애정을 위해 위안부를 거절한다. 자기 어머니의 실제 경험을 영화에 투영한 감독의 단호함은 이제부터다. 남편은 전쟁에서 살아남지만 나치 당원이 아니었던 것, 그럼에도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에 대한 보상감으로 승진과 출세에 몰두한다. 어머니의 상처는 이 남자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덧나버린다. 그녀의 일관된 소망이자 희망은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마비되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얼굴로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들이켠다. 근육이 살아 있는 반쪽 얼굴이 희망일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의 고된 삶을 지켜보며 성장하는 딸을 부둥켜안을 가슴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