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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구로사와 아키라의 고통과 절규, <란>
2005-02-04

1600년경부터 시작된 셰익스피어의 비극시대는 엘리자베스 여왕 말기의 정치적 사건에 영향을 입은 바가 큰데, 구로사와 아키라가 컬러영화로 진입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어두운 모습으로 변화하던 그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 영화제작이 힘들어지면서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상한 구로사와가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른 1970년대는 그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시절이었다. 다행히 <카게무샤>와 <>으로 다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상처받은 그의 영혼은 두 작품에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 <리어왕>의 글로스터가 ‘광인이 맹인의 손을 이끄는 것이 이 시대의 저주다’라고 말하고, <>의 이치몬지 영주는 ‘모든 게 끝이다. 이 세상은 의리도 정도 없는 곳이다’라고 부르짖는다. <>은 구로사와가 <거미집의 성>에 이어 다시 셰익스피어와 조우한 작품이다. 두 노쇠한 남자를 중심에 두고 이중구조로 전개되는 <리어왕>과 달리 <>은 권력을 잃은 영주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에게 부모를 잃은 오누이에게 따로 초점을 맞춘다.

구로사와는 <>을 통해 내면의 이야기와 보편적인 주제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죽어가는 노인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때, 가파른 성벽 위에 선 맹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맛본다.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부처의 족자가 상징하듯이 구원의 길은 보이질 않고, 후회는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만약 구로사와의 작품에서 고통이 더 느껴진다면, 그건 마흔 무렵의 셰익스피어가 간접적으로 느낀 충격을 칠순의 구로사와는 직접 고뇌하고 승화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을 스펙터클의 향연으로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종종 오해되는 것처럼 <>은 70mm 필름으로 찍힌 영화도 아니다. 도호스코프로 활극을 찍던 구로사와는 정작 컬러시대 이후에 액션장면을 찍을 땐 대략 1.85:1의 화면비율에 해당하는 비스타비전 포맷을 더 선호했다(두편의 드라마 <데르수 우잘라>와 <꿈>은 반대의 경우다). <>의 역동성은 <7인의 사무라이> <거미집의 성>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며, <>과 <카게무샤>에서 구로사와가 더욱 신경 쓴 부분은 엄격한 구도와 그에 입혀진 컬러로 생각된다.

프랑스와 일본의 합작영화였던 만큼 DVD 또한 두 나라에서 나온 것이 가장 우수하다고 알려진 반면, 미국 출시본은 화려한 외양에 비해 본편의 화질은 뛰어나지 않다. 국내에서 출시된 <> DVD는 (재생시간을 감안하면) PAL지역의 마스터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화질이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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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ibu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