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사랑’이라는 골치 아픈 감정에 휘말리는가. 왜 그는 유독 그녀만을 사랑하고, 왜 그녀는 그가 아니면 안 되는가.
SBS 드라마 <봄날>은 이토록 어려운 사랑 물음에 조심스레 ‘무의식’이라는 답을 말한다. 상대의 조건, 외모, 성격에 끌리는 듯해도, 그녀가 사랑을 시작하는 진짜 이유는 무의식에 있다는 뜻이다. 왜 하필 저런 사람을 좋아할까 싶겠지만, ‘저런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
<봄날>의 주인공들은 모두 ‘엄마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치명적인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다. 정은(고현정)은 자신을 버린 엄마가 잘 살고 있음에 놀라 입을 다물어버린 바 있고, 은호(지진희)는 엄마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근 30년을 버텨 왔으며, 은섭(조인성)은 손목 긋고 피 흘리는 엄마를 본 뒤로 늘 정서불안이다.
이런 사람들이 ‘내 상처를 잘 치유해줄 것 같은 상대’에게 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치유 받고 싶어서 사랑을 시작한다. 그들에게 ‘사랑’이란 무의식 속의 상처 입은 어린애가 날 좀 치료해달라고 보채는 일이기에 그 어린 아이는 두고두고 내 사랑을 알아보는 눈이 되고, 또한 내 사랑이 힘들어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그 어린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는 죽어도 사랑할 수 없고, 어린애가 알아본 사람과는 죽어도 사랑해야 하는,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거기에 있다.
다 큰 어른을 어린애로 만들고 멀쩡하게 잘생긴 청년을 어리광부리며 울게 하면서 이 드라마는 계속 그들 마음 속의 상처를 들춘다. 그들이 어떤 상처를 겪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사랑을 하게 될지, 상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말한다. 그런 과정을 알고 나니, 은섭이 왜 굳이 정은을 사랑하는지 이해가 가고, 또한 정은이 은호 아니면 안 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은섭이 정은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정은이 은호의 눈물을 닦아주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 잠든 은섭은 그저 상처 입은 어린애로만 보이는데, 그런 은섭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은은 순간 엄마처럼 보인다. 은섭은 무의식 중에 전해져 오는 정은의 온기로 사랑을 느끼는데, ‘형의 여자’임을 알고 난 뒤에도 그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정은에게도 은호를 사랑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준 사람, 은호를 사랑하는데, ‘집 안의 고장 난 물건은 꼭 나 같아서 죄 갖다 버렸는데, 그 사람이 다 주워서 고쳐줬어요. 그때 나도 고쳐졌다는 걸 알았어요’라는 말은 그런 정은의 마음을 잘 설명해준다.
나는 무엇보다도 정은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두 남자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본인이 비뚤어진 관계로 비뚤어진 캐릭터만 좋아해온 나조차 정은의 순수함을 보니 사랑할 만하다 싶다. 특히 은호랑 어떤 사이냐는 질문에, ‘돌아오겠다고… 꼭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라고 답하는 장면. ‘사귀는 사이입니다’ 혹은 ‘결혼할 사이입니다’ 그도 아니면 ‘좋아하는 사이입니다’도 아니고, ‘꼭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라니.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표현은 사실상 얼마나 의미 없는 겉치레일 뿐인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는 일이 어렵지만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지를 생각하게 한다.
두 남자는 그런 정은을 알아본다. 모르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정도로 천진하고 선한 정은을 알아보고, 그들 마음 속의 어린 아이가 시키는 대로 곧 사랑을 시작한다. 아이는 아이를 알아보고, 상처 입은 사람은 훌륭한 의사, 간호사를 알아본다.
<봄날>은 우리가 왜 사랑을 시작하는지, 왜 저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지에 대해 단순하지만 힘 있는 답을 말한다. 사랑은 마음 속 빈 자리를 채우고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라는 답. 선남선녀와 그럴듯한 직업이 등장하지만, 그보다는 ‘사랑’ 그 자체를 말하는 드라마. 자기 상처와 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꼭 해야만 하는 사랑, 누추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봄날>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