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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저> 감독 마이크 니콜스 [1]
박은영 2005-02-01

40년 노장, 다시 출발선에 서다

올해로 일흔셋, 40년 동안 영화를 만들어온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커리어는 유난히 부침이 심하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졸업>으로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브로드웨이의 혈통을 지닌 그는 이후 강렬한 테마와 이미지를 들고 나온 1970년대 영화광 감독들의 뒷전으로 물러서야 했다. <워킹걸> <울프> <버드케이지> 등 덜 연극적이고 더 대중적인 영화들로 선회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지나, 또다시 짧은 소강기에 접어들었던 그는, <위트> <엔젤스 인 아메리카> 등 빼어난 TV영화들을 선보인 직후, 네 남녀의 엇갈린 관계를 조명한 <클로저>로 스크린에 ‘귀환’했다. 그동안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희곡을 바탕으로, 연극식 구성과 리허설을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마이크 니콜스의 영화세계와 그간의 역정을 돌아본다. 편집자

<너 어느 별에서 왔니?>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감독 크레딧을 보고 당황했을 것이다. 마이크 니콜스. <졸업>과 <워킹걸>을 만들었던 그 감독과 혹시 동명이인 아닐까, 살짝 의심도 들었을 것이다. 지구 여자를 공략하려는 외계인의 침공을 그린 코미디로, 대중영화로서의 미덕이 없지는 않지만, 시대착오적인 이야기에 산만한 구성이 거슬리고, 마이크 니콜스의 전작들과 별 친연성이 없는 영화인 까닭이다.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60년대 청춘의 초상(<졸업>), 80년대 오피스레이디의 일과 사랑에 대한 고민(<워킹걸>)처럼 시대의 공기를 제대로 포착한 “타임캡슐 같은 영화”들을 선보였던 그는, 이제 시대와의 끈을 놓치고, 새로운 세대와의 소통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비슷한 시대를 풍미했던 앨런 J. 파큘라와 시드니 루멧도 하향선을 탄 지 오래이니, 니콜스의 부진이 그리 새삼스런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2000년대 접어들어, 칠순이 넘은 니콜스가 놀라운 반전을 펼치고 있다. 난소암 판정을 받고 죽음을 사색하는 여교수의 마지막 여정 <위트>, 레이건 시대 에이즈 환자들이 고발하는 미국의 현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모두 <HBO>를 통해 선보인 TV영화들이었지만, 브라운관 너머로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다. 스크린으로 돌아온 니콜스는 지난해 ‘색다른’ 러브스토리 <클로저>를 내놓았다. <클로저>는 네 남녀(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내털리 포트먼, 클라이브 오언)가 얽히고 설키면서, 서로를 유혹하고, 속이고, 배신하고, 집착하고, 떠나가는, ‘관계’와 ‘승부’에 대한 영화다. 관계를 맺는 데 ‘진실’만큼 중요한 것이 ‘거짓’이고,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다면, 너무 가까이 가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예고편에 울려퍼지던 수잔 베가의 노래 <캐러멜>처럼 달콤하고 나른한 영화가, 결코 아니다. 만장일치의 호평을 얻어낸 건 아니지만, <클로저>는 사랑과 관계에 대한 냉소적 통찰과 ‘이런 모습 처음이다’ 싶은 배우들의 열연이 빛나는 영화다. 그리고 평론가 A. O. 스콧의 지적처럼, 여러모로 니콜스의 데뷔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닮아 있는, 그래서 초심으로의 ‘회귀’ 또는 ‘순환’의 욕망이 읽히는 영화다.

<클로저>는 <누가 버지니아…> <애정과 욕망>과 닮은꼴

<클로저>

복잡한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 남녀, 댄(주드 로)과 앨리스(내털리 포트먼)가 있다. 댄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앨리스의 삶을 소설로 팔고, 그 무렵 만난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에게 반한다. 안나는 마초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와 연인이 되지만, 자신을 갈망하는 댄을 받아들인다. 댄과 안나는 각자의 파트너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둘의 행복한 결합은 이뤄지지 않는다. “사실을 말해줘. 화내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을 하든 널 믿을게.” 이 말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진실은 고통을 낳고, 고통은 관계의 파멸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배우들, 아름다운 이미지로 넘쳐나지만, <클로저>는 아픈 영화다.

네명의 남녀가 사랑과 진실을 가장한 잔인한 말들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이 영화의 구성은, 니콜스의 전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그리고 <애정과 욕망>과 닮은꼴이다. 마초 남성 캐릭터(클라이브 오언-리처드 버튼-잭 니콜슨)가 관계를 지배한다는 구도도, 드러나지 않은 시간과 사건의 ‘이전’ 혹은 ‘이후’를 통해 “관계의 틈”을 이야기한다는 구성도 비슷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는 이 이야기들은 등받이에 기대어 편하게 볼 수가 없다.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고,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아파오는 경험. 성과 사랑의 정치학, 그 역학관계는 이처럼 니콜스가 가장 즐겨다루는 테마다. 커다란 맥락에서 보면, 세태를 반영한 <졸업> <워킹걸> <버드 케이지>에서도 ‘성의 정치학’을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다.

물론 다른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의 광기를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블랙코미디 <캐치-22>, 진실을 밝히려던 여공의 의문사를 따라간 드라마 <실크우드>, 마약의 유혹에 노출된 할리우드 인사이더 이야기 <할리우드 스토리>, 클린턴 부부를 모델로 스캔들의 허와 실을 그린 <프라이머리 컬러스>는 사회 고발 내지는 발언의 의도를 품고 만든, 예외적인 작품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애정과 욕망>

왜 그렇게 복잡한 애정관계에 집착하나요, 라는 질문에, 니콜스는 ‘관계의 코미디’의 대가 안톤 체호프의 영향을 언급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개인사를 들춰 프로이트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어린 시절을 베를린에서 보낸 그는 대여섯살 때 체육 선생과 어머니가 연인 사이임을 알았다고 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싸웠는데, 선생님이 어머니의 목걸이를 나꿔채 창밖으로 집어던지자, 어머니가 그걸 찾으러 뛰쳐나가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어머니의 비밀 연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 기억, 그런 경험은 상처가 된다.” 유혹에 약하고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는 영화 속 남자들을 닮았다는 그는, 실제로도 네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아내려 해선 안 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모두 드러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서로에게 흡수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가 깨달은 사랑의 진리가, <클로저>의 교훈이다.

그의 노하우와 철학은 연극무대에서 출발했다

<워킹걸>

마이크 니콜스는 1950년대 후반, 배우이자 작가인 에일린 메이와 콤비를 이룬 코미디언이었다. “미국식 즉흥 코미디”를 개발하고 주도한 니콜스-메이 듀오는 클럽과 브로드웨이와 TV를 넘나들며 활동했고, 그들의 지적이면서도 신경증적인 유머 스타일은, 훗날 우디 앨런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1961년 메이가 해체를 선언하고 떠나가자, “팀의 반쪽”으로서 무력감에 빠져 있던 니콜스는 브로드웨이의 러브콜을 받고, 닐 사이먼의 희곡 <맨발로 산책을> <별난 커플> 등을 무대에 올려 토니상을 받는 등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그 자신이 무대에 섰던 배우이고, 브로드웨이에서 경력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후 영화들의 모양새를 좌우하게 됐다. 에드워드 알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연출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애정과 욕망> <위트> <엔젤스 인 아메리카> <클로저> 등 희곡으로 쓰였거나 연극으로 선보인 작품들을 ‘취사 선택’한 것이다. 그외의 작품들도 소설을 각색한 것들이다.

이런 니콜스의 이력과 취향은 부침이 심했던 그의 커리어와도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등 영화광 출신이거나 영화학교 출신인 ‘영화의 자식들’에게 밀려나면서, 긴 슬럼프를 겪게 된 것이다. “그의 커리어는 혼란스럽다. 다른 이의 작품을 옮겨오는 탓에 자신의 고유한 감성과 주장이 드러나지 않았다. 60년대와 70년대 그의 작품들은 반항적인 젊은 세대를 다뤘지만, 그는 뉴할리우드의 와일드한 아이들과 맞지 않았다. 코폴라, 스코시즈, 알트먼은 고유한 스타일을 완성했고, 인습 타파를 주장하는 몽상가로서 신화적 존재가 됐지만, 니콜스는 언제나 냉소적인 관찰자였고, 각색자였다.”(A. O. 스콧)

니콜스의 영화에 ‘연극적’이라거나 ‘문학적’이라는 평이 따라붙는 건 당연하다. 대사가 많고, 신이 길고, 정적이고, 배경이 단조롭고, 이미지가 약하다는 단점이 뚜렷한 만큼, ‘연극’에 기대고 있어서 갖는 장점 또한 분명하다. “캐릭터와 대사 연출이 뛰어나, 인간에 관한 영화라면 더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콜스는 자신의 영화가 ‘연극적’이라는 단언에는 반발한다. “연극무대의 그 많은 대사와 상황들을 일일이 영화에 반영할 수 없고, 무대에서 프로필로 느끼는 배우와 스크린에서 눈빛으로 느끼는 배우는 다르다. 나는 그 둘의 차이를 알고 있고, 다르게 가는 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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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심은하·디자인 김순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