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 를 보면 영화 가 떠오른다. 시나리오 한 우물만 파던 ‘할리우드 키드’는 결국 자신의 ‘걸작’이 할리우드 영화의 짜깁기임을 깨닫는다. 는 내 것과 남의 것 사이 긴장을 놓친 ‘할리우드 키드’처럼 공식과 새로움 사이의 긴장을 버리고 전자에 안주한다.
드라마의 영원한 테마는 사랑이고 빠질 수 없는 갈등은 질투일 테니 ‘또 삼각관계냐’라는 냉소는 접더라도 는 장면, 대사, 인간관계, 캐릭터까지 어디선가 본 듯하다. ‘한류’를 목표로 만들다보니 보편에 기댈 수 밖에 없음을 감안해도 ‘낡은 한국 드라마 공식의 완전정복’를 보는 듯해 씁쓸하다.
‘결정적 장면들’ 중에 하나를 들라면 준영(권상우)의 혜인(김희선) 구출작전이 있다. 버려진 공장 터, 혜인은 불량배들에게 붙들려 울부짖는다. 각목 하나 달랑 든 준영이 날아 들어오고 멋진 발차기를 날린다. 착지한 준영이 카메라를 향해 눈빛을 쏘지 않을 리 있겠는가?
건우(연정훈)가 미국에서 혜인에게 ‘꽂히는 순간’도 그렇다. 건우는 분수에 빠져 젖은 혜인이 감기 걸릴세라 고급 옷가게로 데려간다. 건우가 골라준 붉은 코트를 혜인이 입고 나올 때 슬로 모션과 음악이 빠질 리 없다. 멈칫한 건우의 넋 나간 눈동자는 의 박신양이 충분히 보여줬던 것이다. 또 미국인 교수에게 찍힌 건우가 기지로 신임을 얻는 장면은 의 김래원과 짝을 이룬다.
이런 장면들은 식상한 캐릭터와 관계설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성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남성, 여리고 수동적이며 남성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환상 속의 그대’가 엮이려니 인물들은 고정된, 가부장적인 성역할에 충실하다. 준영은 주먹을, 건우는 현금을 날리며 ‘능력있는 남성’이 되어야 하고 혜인은 스웨터와 함께 눈물을 수시로 짜며 ‘착한 여자’로 남아야 한다. 관계설정의 ‘고전성’은 남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준영과 건우는 주먹다짐 끝에 서로의 남성성을 인정하며 우정을 다짐한다.
인물의 성격이 평면적이니 대사와 에피소드도 뻔하다. 혜인은 “준영아, 보고 싶어, 사랑해” 그리고 “흑흑흑” 말고 그만의 대사는 거의 없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준영의 어머니가 모질게 내치지만 분노도 없다. 준영에 대한 그리움 외에 그가 느끼는 고통이나 욕망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드라마가 다 그렇지 뭘 그러냐’라고 할 수 있는데 다 그렇지 않다.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상상이나 캐릭터의 다변화는 이미 형성중이다.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폐인’을 만든 등엔 ‘캐릭터의 다른 면모’가 있었다. 드라마의 자기복제가 결국 한류의 퇴보를 가져올 거라는 거창한 이유까지 들지 않더라도 단지 ‘보는 재미’를 위해서 공들인 가 ‘드라마 키드의 생애’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