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영화학자인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1945년을 전후로 영화이론과 관련한 새로운 현상들이 목도된다고 말한다. 그런 현상들 가운데에는 이론의 전문화에 따른 그것과 실천 사이의 분리라는 것도 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이론가들은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꿈꾸며 또 계속해서 그것을 제의했던 데 반해 영화감독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안들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자신이 만들고 싶지 않거나 만들 수 없는 영화들을 만드는, 소통불가의 극장이 출현했다.”
카세티처럼 다소 엄격하게, 따라서 다소 협소하게 영화이론을 정의한다면, 자크 오몽의 은 아마도 지금에 나온 것보다 빈약한 모양새를 갖췄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여기서 오몽이 이론에 대해 좀더 ‘느슨하게’ “시네아스트들이 나름대로 갖고 있는 자발적인 철학”의 견지에서 다가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스스로의 예술적 의식과 자기 직업에 대한 생각과 목적, 말하자면 사상”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들로서 영화감독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다소 명확하고 일관되게 담론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들을 다룬다. 그런 기준에 의해 브레송, 베르토프, 에이젠슈테인, 파졸리니, 로셀리니 등이 불려나오고 그들의 머릿속을 채웠던 영화에 대한 흥미로운 생각들이 다양한 길들 위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그들과 그들의 ‘이론들’은 이 책 속에서 한번 등장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불려나온다. 그건 저자가 단지 그들이 개진한 ‘이론들’을 하나씩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쉬운 방식이 아니라 그것들을 영화이론의 체계 안에서 문맥화하고 재구성하는 좀더 대담한 방식을 기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론적 지위로 치자면 거의 주변적이었던, 그러나 심도와 흥미가 덜하지는 않는 생각들이 체계적인 가지들을 따라 배치되면서 이전에 보지 못한 계보학을 만들어낸다.
확실히 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다양한 사색의 통로를 열어주기에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예컨대 컷과 숏을 혼동하는 듯한 잘못된 용어 선택, 어색한 번역은 그런 통로들에 다가가는 데 종종 난관으로 작용한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번역서에 새로 달린 그 많은 역주들이 애초에 가졌을 선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나 히치콕처럼 너무 잘 알려진 인물들에 대한, 대체로 문맥과 관련없고 종종 오류도 눈에 띄는 역주들은 독서의 호흡을 방해한다. 특별히 모르지 않는 항목들은 차라리 건너뛰고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