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남색 염료를 풀어놓은 듯한 하늘, 바닥의 모래알 숫자까지 헤아릴 수 있을 듯 투명한 바다. 하지만 행복의 탄식을 쏟아내기엔 아직 이르다. 이 낙원에 도착한 40여명의 사람들은 비행기 추락사고 때문에 이 섬에 불시착했기 때문이다. 무인도에서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ABC>의 는 ‘<X파일> 이후 최고의 TV컬트’라는 엄청난 수식어를 달고 한국에 상륙했다. 를 성공시킨 프로듀서 J. J. 에이브러햄이 제작한 이 시리즈는 13개 에피소드에서 22개 에피소드로 연장방송이 결정된 상태이며, 미국에서는 현재 12회까지 방영된 상태다. 12월25일 한국에서도 첫 방영을 시작한 는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KBS2에서 볼 수 있다.
는 처음 방영 때는 그저 그런 재난물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난해 12월22일, 미국 시청률 부동의 1위라는 < CSI 과학수사대 >의 아성마저 무너뜨리는 진기록을 세우더니, 최근에는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올해의 TV프로그램’ 10편에 뽑히기도 했다. 문제는 이 드라마의 장르를 논하는 것이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누가 “는 어떤 드라마야?”라고 묻는다면 마니아들도 머리를 긁적이는 수밖에 없다. 처음 시작은 분명 비행기 추락사고라는 재난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괴물이 등장한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짐승소리에 겁에 질려, 같은 인간 대 괴물의 사투를 그린 드라마일까 생각하면 난데없이 등장인물이 쏜 총탄에 북극곰이 죽는다. 열대의 섬에 북극곰이라니! <X파일>과 성인판 와 … 영화를 보다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다. 하지만 는 그 어느 것과도 같지 않다.
의 구성은 두 가지 축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은 조난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거대한 위험 요소에 대한 것이고, 작은 흐름은 40여명의 생존자 중 주요 등장인물인 10여명의 개인사다. 매회, 주요 등장인물 한명의 과거가 드러나고, 그래서 작은 반전들이 생긴다. 섬에서는 멧돼지를 잡고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비행기를 탈 때까지만 해도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해 휠체어에 몸을 의지했다든가, 선량해 보이는 사람이 실은 악독한 은행털이였다든가 하는 식이다.
인종적 편견이나 클리셰를 무방비로 노출한다는 단점도 있지만, 그 어느 미국 드라마보다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아랍계인 사이드는 통신기술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서 구조신호를 보내는 데 앞장서고(성과는 없다), 한국계인 선은 한의학(또는 아로마테라피)에 대한 지식으로 다 죽어가던 천식환자를 살려낸다(선은 무인도의 대장금일까?). 하지만 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열린 구성에 있다. 장르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매회가 끝날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동호회에서 의견을 주고받는다. 단순한 감상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신의 추론을 펼쳐 보인다. 이 섬은 대체 어떤 공간일까 하는 것부터 왜 열대의 섬에 북극곰이 나타났을까 하는 것 등 다양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진다. 드라마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상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윤진이 연기하는 선이 상반신을 벗고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그 광경을 실수로 본 마이클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속옷을 집어 건넨다. 선의 정면 숏에서 그녀는 두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있는데, 미국 시청자들 눈에는 그 가슴이 너무 평평해 보였던 모양으로, “선이 트랜스젠더라는 게 반전이다!”라는 어이없는 예측을 낳은 일이 있었다. 선의 남편인 진 역을 맡은 배우 대니얼 대 김은 한국말에 서투른데, 어이없게도 서투른 한국말에 경상도 사투리가 묻어난다. 한국 팬들은 “로버트 할리냐?”고 투덜대다가, 아내에 대한 가부장적 태도와 다소 단순무식한 일면에 “혹시 빈센트(개)를 잡아먹는 설정은 아니겠지”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시청자들이 가장 궁금해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바로 그들이 있는 섬이 어떤 곳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이다. 일단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섬이 보통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기타를 죽도록 치고 싶어하던 남자의 머리 위에 기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거나, 하반신 불수이던 남자가 두발로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식. 이상한 일은 이것뿐이 아니다. 극중 의사인 잭은 죽은 아버지를 관에 넣어 비행기에 싣고 가는 중이었는데, 섬에서 아버지가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마치 신기루처럼 이곳저곳에 출몰하던 아버지, 마침내 아버지의 관을 찾아냈는데 관은 텅 비어 있다.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섬의 정체만 안다고 수수께끼가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생존자들이 사투를 벌이는 대상이 회를 거듭할수록 달라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비행기 추락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뒤 정체 모를 괴물이 살아 있던 조종사를 잡아 죽여서는 나무 꼭대기에 얹어두었다. 괴물 때문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 일행 중 누군가가 지명수배자라는 사실을 몇몇 사람이 알게 된다. 지명수배자가 누굴까 고민하던 차에 이 섬에 16년째 구조요청을 하는 무전을 송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다 한명씩 정체 모를 존재와 숲속에서 마주치고(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생존자 중 한 사람이 탑승자 명단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의문의 사나이는 임신한 여자를 납치해서 어딘가로 사라진다. 폐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골수 팬들을 다수 거느린 동시에 대중적 성공(시청률)을 거머쥔 에 남은 고민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결말지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화 의 마니아들이 느끼는 “이 엄청난 이야기를 어떻게 맺으려고?” 하는 애정어린 우려는 에 그대로 적용된다. 이제 TV 앞에 앉아라, 그리고 상상하라. 저들이 누구일지, 저곳이 어디일지. 머리를 굴리는 자만이 즐거움을 얻으리니.
에 관한 흥미로운 추론들
대체 이 드라마의 정체가 뭐야? 엉?
‘연옥’ 설 가장 먼저 대두된 이 섬의 정체에 대한 이론. 생존자들이 실은 비행기 사고 때 다 죽었고, 이곳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중간단계의 장소라는 이론이다.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의 상처없이 살아남은 게 수상하다는 점에서, 실은 모두 죽었을 것이라는 이 이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외계인 납치’ 설 이나 을 즐겨 봤던 사람들이 를 보며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가설이다. 대부분의 팬들은 “외계인 납치라고 덜렁 얘기해버리면 완전히 허무개그다”라며 이 가능성을 외면하고 있다.
‘악마의 씨’ 설 최근 방영된 12번째 에피소드에서 강력하게 부상한 이론. 임신부인 클레어가 이 섬에 오기까지 이야기는 좀 이상하다. 꼭 그 비행기를 타라고 했던 점쟁이는 혹시 비행기가 추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게다가 클레어는 납치된다. 혹시 그녀가 잉태한 아이가 악마의 씨라든가, 세상을 멸망시킬 존재라거나… 그런 게 아닐까? 심지어 적그리스도라는 설도 있다.
‘생존자의 꿈’ 설 사실 딱 한명만 사고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이 꿈을 꾸는 것이다. 혹은, 살아남은 사람이 다중인격으로, 여러 인물들을 혼자 연기하는 것이다. 아니면 한 사람이 겪는 가상현실 속의 이야기라는 추론도 있다.
기타 이 섬이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설이 있다. 특정 지역을 지나던 배와 비행기 등이 사라진다는 ‘버뮤다 삼각지대’가 바로 이들이 추락한 섬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혹은 북극점 아래의 지하세계라는 설도 있는데, 이 가설은 북극곰의 등장으로 잠시 각광받았다. 흰 토끼가 등장할 때는 가 떠오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