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편집장이독자에게
[편집장이 독자에게] 가늘고 길게

새해 첫호를 만들고 있는 지금은, 아직 2004년이다. 신년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기획기사를 준비했지만 새해를 실감하긴 이르다. 그러다보니 기사를 쓰면서 번번이 실수가 나온다. 2003년을 ‘지난해’로, 2004년을 ‘올해’로, 2005년을 ‘내년’으로 써놓는 식이다. 의식과 달리 몸이 새로운 시간에 적응 못한 탓이리라.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1년을 받아들이는 데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 손에 완성된 신년호가 쥐어지면 그제야 2004년이 끝났다는 걸 실감하겠지 싶다.

영화주간지 기자로 10년을 지내다보니 끝과 시작을 느끼는 방식도 기사 마감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1년의 무게가 50권 무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 50권의 잡지가 1년 삶의 궤적이고 이제 한주 한주 새로운 50권을 만들어갈 일이 남았다.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지루하지만 이런 생활패턴이 주는 중독성 즐거움도 있다. 무엇보다 노동의 결과가 눈앞에 보인다는 점인데 특히 지난 한해를 돌아보는 요즘 같은 때는 위안이 된다. 잘했든 못했든 지난 1년간 잡지 50권을 만들었기에 헛된 시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간이 쌓인 흔적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이럴 때는 다행이다. 시간의 퇴적물이 항상 눈에 보이는 건 아니기에, 그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건 기자라는 직업이 누리는 작은 축복이기도 하다. 누군가 1년을 어떻게 보냈어, 라고 물으면 그저 잡지 50권을 쌓아놓는 것으로 대답이 될 것 같다. 아마 전업작가의 즐거움도 이런 종류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당신은 인생을 어떻게 보냈나요, 라고 누가 물으면 자신의 쓴 책들을 언급하는 걸로 충분한 답이 될 것이다.

왠지 새해에 걸맞게 “2005년 은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있었다. 해가 바뀌면 뭔가 달라져야 하고 굳은 결심 한두 가지는 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매주 잡지를 만들면서 갑자기 그런 게 생기진 않았다. 그저 한주 한 주 열심히 만들겠다는 말로 대신하는 수밖에. 다시 시간이 쌓여 한권 한권 잡지로 변하는 모습이 새로운 1년을 만들 것이다. 그러고보면 세상 모든 일이 시간이 조금씩 쌓여서 가능해진다. 어학을 공부하는 것도,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하다못해 금연을 하는 것도. 갑자기 뭔가 달라지려 하면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갑작스런 다이어트로 부작용이 생기고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그런 일들이 시간을 차곡차곡 개켜두지 않아 생기는 일이 아닐까. 어떤 목표든 ‘굵고 짧게’보다 ‘가늘고 길게’ 가야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한 걸음의 의미로 은 1월 한달간 아직 생소한 신인감독 4인에 관한 릴레이 인터뷰를 시작한다. 아직 극장에서 개봉한 장편영화가 한편도 없는 감독이지만 최진성, 김종관, 이윤기, 신재인 등 네 사람은 일찌감치 평론가의 주목을 받은 인물들이다. 그들을 미리 소개하는 건 그들의 영화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던 점도 있지만 이 다루는 영역을 확장해보려는 의미도 있다. 많은 관객과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들이 만든 영화는 일찌감치 진지한 평가를 필요로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미국, 일본, 프랑스, 홍콩, 영국, 독일 등 6개 나라의 화제작 8편을 소개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직 한국 관객을 만나지 못했고 영화제가 아니라면 만날 가능성이 많지 않은 영화들이지만 이 개봉에만 얽매이는 잡지가 되면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엔 특히 더. 은 앞으로도 관심 영역을 넓혀나갈 것이다. 물론 가늘고 길게.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