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제타 존스는 의 의상디자이너가 준비한 빨간색 가죽 트렌치 코트를 마주한 순간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유로폴 요원을 연기하면서 빨간색 가죽 트렌치 코트를 입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11명의 남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호르몬을 분비하는 남자영화 에서, 그는 ‘전설적인 대도의 핏줄을 물려받은 유로폴 요원 이사벨 라이히’라는, 현실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을 듯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영화의 스포트라이트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훔쳐내고 말았다. 들려오는 말들에 따르면, 줄리아 로버츠는 크레딧에서 자신의 이름이 캐서린 제타 존스의 뒤에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심히 언짢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언짢음은 단순한 크레딧의 순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의 제작자인 제리 와인트럽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여인을 가졌다”라며 기뻐했지만, 캐서린 제타 존스와 줄리아 로버츠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여배우들이다. 줄리아 로버츠의 스타성이 친근한 대중적 이미지에 기대고 있다면, 캐서린 제타 존스는 반세기 전 스튜디오 시절의 여배우들을 연상시키는 비일상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서 보통 사람의 겸손함을 요구한다면 좌절할 가능성이 크다. 그가 “나 역시 평범한 여자이기 때문에 외모에 대해서 자신이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항상 남편에게 ‘혹시 내 엉덩이, 너무 커 보이지 않아?’ 하고 물어보곤 하지요”라거나 “여성스러워 보이는 여자가 좋아요. 그런지 패션 따위는 질색이에요. 전 열렬한 페미니스트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외양에 신경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여자는 영리하고 현명한 동시에 육체적으로 매력적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라고 자뭇 진지하게 토로할 때, 이런 종류의 도도함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좀처럼 참아내기가 어려울 테다.
하지만 이 글래머러스한 여배우에게서 웨일스 출신 시골소녀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순간, 그 도도함에 대한 반감도 쉬이 무너져내린다.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로 여우조연상에 거명되자 “TV를 보고 있을 엄마, 아빠! 너무 감사해요!”라며 웨일스 뱃사람식의 환호성을 거리낌없이 내지르던 천진난만한 모습은 ‘할리우드에서 고고하게 구는 영국 소프오페라(주부들이 즐겨보는 연속극) 출신 촌년’이라며 그를 폄하하곤 했던 영국의 타블로이드들조차 모조리 팬으로 만들어버렸다. “펍에 가서 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모두가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봐요. 그럼 전 이렇게 말하곤 했죠. ‘안토니오 반데라스랑 영화찍고 있어.’ 그럼 모두가 그저 담담히 대꾸하죠. ‘오! 그거 좋네.’ 그러니까 저를 두고 ‘가난한 고향마을 소녀가 할리우드 귀족과 결혼했네’ 운운하며 떠들어대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에요”라고 갸르릉거리는 것도 고집세기로 유명한 웨일스 출신답다. 그리고 고집센 소녀는 자신을 할리우드식으로 기만하고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스타의 매력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제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스타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렇다면 왜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해야 하죠?” 캐서린 제타 존스는 시골소녀에서 할리우드 스타가 되었고, 옆집 처녀처럼 대중에게 친근함을 갈구하는 여배우들 사이에서 오히려 고고한 흑백영화 시절의 스타들을 닮아간다. 그러나 그레타 가르보가 학교를 중퇴하고 스톡홀름의 어느 백화점에서 모델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듯, 경찰의 딸이었던 마를렌 디트리히가 젊은 나이에 카바레 가수로 돈을 벌었듯, 캐서린 제타 존스의 콧대 높은 자긍심은 가쁜 허리를 거머쥐고 연극무대와 TV를 종횡무진했던 어린 시골소녀의 야망으로부터 실현된 것이다. “내 또래의 여자애들이 인형이나 가지고 놀 때, 저는 지역 비평가들이 저의 연극에 대해 뭐라고 쓸 것인지를 염려해야 했어요. 다른 여자애들이 섹스를 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울 때, 저는 극장 피로연에 가서 마티니를 마시고 있었죠. 끊임없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저는 제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었던 것을 지금 하고 있어요.”
의 속편 에 출연할 그는 미국의 전설적인 소프 오페라 의 극장용 리메이크를 두고 저울질하고 있는 중이다. 영국 소프 오페라 출신의 스타가 미국 소프 오페라에 뛰어든다고? 언젠가 인터뷰에서 “전 라스베이거스의 볼품없는 무대에서 드랙퀸들과 쇼를 하고 싶은 야망이 있어요”라고 했던가. 조금 무례하고 약간 도도하게 굴 줄 아는 캐서린 제타 존스는 할리우드식 천박하고 번들거리는 스타덤의 매력을 멋지게 이용할 줄도 안다. 태생적인 고고함이나 후천적인 친근함이 누리지 못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