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스타일’이었다. 그는 의 시작에서 “스타일은 인간 자신이다”라는 문장을 끼워넣을 정도로, 주체의 생생한 체험과 세계관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스타일을 중요시했다. 혹은 기의보다는 기표가 훨씬 중요함을 설파했던 기호학의 의견을 생각해보자. 왜 이렇게 한편의 블록버스터를 설명하기 위해 거창한 문장들을 끌어오냐고? 그것은 케리 콘랜의 데뷔작 를 볼 때 스타일이 아닌 다른 요소들에 집중하려 한다면 무척이나 앙상한 텍스트가,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상상력의 기표인가를 확신하는 눈길을 통해서는 무척이나 다채롭고 풍부한 텍스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로저 에버트는 를 두고 시리즈처럼 전세계적인 열광을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며, 그 부분적인 이유로는 이 영화의 장점 중 많은 부분들이 ‘드라마틱’하기보다는 ‘시네마틱’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1939년 뉴욕, 6명의 과학자들이 차례차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을 취재 중인 열혈 기자 폴리(기네스 팰트로)는 다음 납치될 순서가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제닝스 박사를 만난다. 제닝스 박사는 ‘토튼코프’라는 비밀스러운 이름을 남긴 채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폴리가 토튼코프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틈도 없이 뉴욕 거리에는 난데없는 거대한 괴물 로봇들이 등장하여 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는다. 구조 요청을 받은 용맹한 파일럿 스카이 ‘조’ 캡틴(주드 로)은 로봇과 격투를 벌이다가 3년 전에 헤어진 옛 연인 폴리와 재회한다. 알고 보니 그날 밤에는 뉴욕뿐 아니라 전세계 대도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로봇들이 석탄과 원유, 제철 공장 등 핵심 군용 자원을 골라서 교묘하게 공격을 가했었다. 국가에선 스카이 캡틴과 그의 부대에 이 사건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과학자 실종과 이 사건의 연관성을 눈치챈 폴리는 조에게 사건을 공유하자고 제안한다. 조의 충성스러운 오른팔인 천재공학자 덱스(지오바니 리시비)와 애꾸눈 해군 사령관 프랭키(안젤리나 졸리)가 가세하면서 금세기 최고의 두뇌로 일컬어졌던 과학자 토튼코프가 세계의 종말을 꾀한다는 비밀이 점차 드러난다.
영화가 2/3쯤 다다랐을 무렵 인물들 중 한명이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지금까지 시체를 뒤쫓고 있었군.” 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가 어떤 종류의 시체 애호증처럼 비쳐지더라도 과언이 아닌 것이, 이 영화는 자신이 어린 시절 보고 자라며 열광했던 특정 영화들을 다시금 부활시키는 것에 목숨을 건 어떤 영화광의 순정어린 고백담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멀게는 프리츠 랑의 나 메리안 쿠퍼의 , 혹은 프랭크 카프라의 , 가깝게는 조지 루카스의 시리즈와 브래드 버드의 를 곧장 떠올리게 하는 영화들의 목록은 어쩌면 케리 콘랜을 (팀 버튼보다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직계후손으로 위치시킬지도 모른다.
콘랜이나 타란티노 모두 각자 나름의 상상 속 시네마테크를 건설하며 그 속에서 매일 한가롭게 노니는 만보객들이다. 그 여유만만한 시선에는 뭐랄까, 절정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긴장감이 없다. 그들은 매 순간순간을 충만히 맛보고자 하는, 모든 순간이 절정이자 시작인 그런 영화광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속에서 내내 카메라를 들고 안절부절못하면서 “딱 두장밖에 안 남았어”라며 자신이 목도하는 온갖 신비로운 광경들을 찍기를 주저하는 폴리처럼, “더 흥미로운 게 남아 있을 거야”라며 애써 자신의 소망 충족을 뒤로 미루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그 자세처럼, 케리 콘랜은 프레임마다 자신이 특정 영화에 얼마나 매혹되어 있는지를 천천히 아로새기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결말을 뒤로 미루며 계속 그 사이를 만보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이 영화의(그리고 폴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결정적 장면’이라는 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이 영화를 구축하고 지속시키는 힘은 그 도래하지 않을 결정적 장면을 기다리는 끈기 자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토록 ‘어제의 세계’를 탐닉하는 가 스스로를 시각화하는 방식은 또한 ‘내일의 세계’에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첨단 테크놀로지로 ‘어제’라는 1930년대의 뉴욕을, 혹은 그 어제에 매혹되어 있는 상상력을 ‘현실’이라는 투과층을 거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과거와 미래의 충돌이 이 영화의 전반에 걸쳐 지극히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그 점은 비단 테크놀로지의 문제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 구현되는 미학에서도 역시 드러나는 바다. 그러니까 영화 속 배경인 1939년이 2차 세계대전이 시작한 바로 그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바야흐로 나치라는 미증유의 새로운 파시즘 세력이 등장하고 세계 곳곳에 메트로폴리스가 성립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에서 주인공들을 둘러싼 뉴욕의 마천루, 1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엔 희망이 없다고 믿고 새로운 기술의 낙원 설립을 꿈꾸었던 과학자 토튼코프의 인공적인 소세계, 과학 기술과 규모의 숭고를 향한 파시즘적 미학에의 경도, 비행기와 최신 통신기술에 목숨 거는 젊은이들의 물신주의에 가까운 열광은 그 모든 시대적 배경과 유행 조류들로부터 그리 머지않다. 당시에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근심과 열광을 담아 질주했던 당대 ‘미래파’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과학 테크놀로지가 두려움과 매혹의 양가감정을 안겨주었음을, 는 60여년 전의 바로 그 흥분된 매혹을 21세기의 최첨단 CG기술을 통해 ‘(일부러) 조악하게’ 부활시킨다. 이건 정말 ‘오래된 미래’의 풍경이다.
영화 속 미술
최첨단 CG로 만든 수공업적 미학
의 미술을 담당한 케빈 콘랜은 케리 콘랜의 형이다. 영화에 미쳤던 동생과 코믹북에 미쳤던 형이 의기투합하여 내놓은 야심작 의 룩(look)과 질감은 지금까지의 ‘블록버스터’에서 볼 수 없었던 수공업적 미학으로 충만하다. 케빈 콘랜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플레이셔 형제의 만화, 일러스트레이터 알렉스 레이먼드, 산업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위, 유명한 SF아티스트 첼시 본스텔, 마천루 묘사로 유명한 건축 일러스트레이터 휴 페리스 등을 꼽은 바 있다. 이들의 영향은 속에서 뭉개지는 듯한 윤곽선과 회갈색 주조의 톤, 단순하고 거친 듯한 레트로풍의 기계 묘사, 인물들의 클래식한 아름다움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