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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화인’ 캠페인을 시작하며

“영화인들이 불우한 분들을 위해 기부를 하는 캠페인을 하면 어떨까요?” 회사 사업팀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 때 솔직한 나의 첫 느낌은 “글쎄, 그게 잘될까”였다. 좋은 일 하자는 얘기건만 무조건 반색을 하지 못한 건 내 몸에 뿌리깊은 어떤 회의주의 때문이었으리라. 자선행사에 적극 나서 본 적 없는 나로선 어딘지 어색하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영화만 잘 만들면 되고, 잡지 만드는 사람들은 잡지만 잘 만들면 된다는 귀차니스트의 신조에도 왠지 어울리지 않는 짓 같았다. 더군다나 이런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한다는 건 괜한 생색내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시절엔 누구나 그렇겠지만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상주의가 있었다. 나처럼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인 경우엔 그게 의식화의 핵심사항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일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둘러싼 토론이었다. 선배들은 정치투쟁을 역설했고 자선이나 봉사활동을 말하는 친구들은 프티부르주아라는 비판을 받았다. 프티부르주아 또는 소시민. 이 말은 당시 운동권에선 저주받은 단어였다. 그런 말을 듣느니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그래서 선배들의 숭고한 열정이 융단폭격처럼 쏟아지는 동안 후배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선배가 됐을 때 똑같은 행동을 했고 자선이나 기부 같은 단어를 들으면 ‘소시민의 자기 위안’이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소시민이 된 지금, 지난날의 이상이 사라진 빈자리에 들어선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 대해 푸념과 한숨을 내뱉는 것 말고 직접 남에게 도움되는 일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큰 열망과 함께 나누며 살겠다는 작은 열망도 함께 식어버린 건 아닌지. 이번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이미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했다. 많은 영화인들이 이미 다양한 자선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주목하게 됐다. 나는 이번 캠페인이 우리가 잊고 지낸 소중한 꿈을 나누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동안 은 적지 않은 캠페인을 벌였다. 올해 파병반대 캠페인의 경우,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영화인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서 꽤 비중있는 것임을 확인시켰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영화인’ 캠페인을 시작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 일개 영화잡지이지만 영화잡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런 캠페인을 통해 알았다(당연히 외국의 상업적 영화잡지에선 이런 캠페인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아름다운 영화인’의 목표가 캠페인의 폐지라고 생각한다. 캠페인은 절대적 다수가 참가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 정말 많은 영화인이 수익의 1%를 기부하고, 불우한 이웃을 위한 시사회를 개최하며, 꾸준한 봉사활동을 한다면 캠페인은 즉시 중단될 것이다. 사무국의 일상적 활동이 캠페인을 대신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혹여 이 이나 로 바뀌는 건 아닌지 염려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단언컨대, 절대 아니다. 지금 영화인들에게 작은 정성을 요구하듯 도 그저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는 얘기다. 그게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 담당할, 영화잡지 이상의 몫이리라.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겠다. 그동안 이창 칼럼을 빛내주던 장진 감독이 이번 원고를 마지막으로 연출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글보다 좋은 영화로 여러분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계속 더 써달라는 말을 차마 못 꺼냈다. 재미없는 영화 만들면 다시 글 쓰라고 졸라볼 참이다(^^).

또하나는 아주 긴급한 소식.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홍준 집행위원장이 해촉될 위기다. 내겐 이 소식이 영화제가 제공했던 모든 즐거움을 뺏겠다는 말로 들린다. 부천시는 김홍준을 없애서 영화제를 무색무취의 관변행사로 만들 참인가? 부천영화제를 사랑했던 분들이라면 부천시에 즉시 항의를 전했으면 좋겠다.

어느덧 2004년의 해가 저물고 있다. 독자 여러분, 건강하고 좋은 일 많이 생기는 새해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