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번 완성한 필름을 다시는 보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보신 영화 도 한 20년 전에 보고 안 봤다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디테일한 질문은 하지 마세요. 기억을 못할지도 모르니까 (웃음)”
지난 해 11월 BAM (브룩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의 씨네마테크에서는 짐 자무시 특별전이 열렸다. ‘독립적인 영혼: 짐 자무시’라는 이름 아래 열린 이 특별전은 뉴욕대학 재학시절 만든 데뷔작 부터 최근작 까지 그의 전작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뉴욕을 대표하는 감독답게 극장을 찾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행렬로 초겨울 삭막한 브룩클린은 붉은 혈색을 띄고 있었다. 특히 감독과의 만남을 위해 그가 직접 극장을 찾은 날은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남색 트레이닝 윗도리에 청바지, 생수병을 들고 스크린 앞으로 걸어 들어오는 짐 자무시의 행색은 델리에 샌드위치 사러 나온, 혹은 지하철에서 천만번쯤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뉴요커의 그것이었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그 흰머리, 위로 뻗은 변함없는 스타일의 백발만큼은 그를 독특하게 차별화시키고 있었다.
‘관객과 감독’의 관계는 ‘기자와 감독’의 관계에선 상상할 수 없는 따뜻한 기운과 신뢰가 오간다. 저기 스크린 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재작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만난, 전세계 기자들 앞에서 심드렁하게 대답을 이어가던 그 사람이 아니다. 수백 번은 대답했을, 처음 영화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마치 처음처럼 흥미롭게 이야기해주던 그가, 최근 대통령선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잠시 침묵 끝에 입을 연다. "깊은 슬픔, 통탄의 시절을 보내고 있어요. 여전히 이 나라, 이 땅을 사랑하지만, 선거결과를 보고는 당장 파리로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만큼" 부시의 재선에 대한 뉴욕커들의 깊은 탄식은, 짐 자무시를 포함하여, 거의 비슷하다. 이어서 한때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빔 벤더스의 최근 몇몇 작품들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과 (그러나 여전한 개인적인 친분과) 자신의 느린 작업스타일, 그리고 영원히 독립영화인으로 살수 밖에 없는 이유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근 조근 설명했다.
30,40분간의 짧은 만남,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문 밖을 나오니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춥다. 뉴욕의 겨울이 시작되는 소리다. ‘커피와 시가렛’이 허락되지 않은 상영관 밖을 나와 씨네필들 사이에 둘러싸여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무시. 그 어둠 속에서, 짐의 흰머리가 빛나고 있었다. 수줍어 차마 인사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돌아서는 길, 지하철로 향하는 그 길에 나는 생각이란 걸 했다. 이런 짧은 만남들을 기록하고, 이 생생한 느낌들을 기록하리라. 그렇게 나는 ‘애비뉴C’의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다. ‘천국보다 더 낯선’ 이 도시에서 끄적거리게 될 아주 사적인 영화노트들이 어떤 모습이 될는지. 이 기행문을 써나가는 길엔 ‘맛있는 영화리스트’를 뽑아주는 친절한 ‘자가트(zagat)리스트’도 지도도, 방향계도 없다. 도시 곳곳에 흩뿌려진 수많은 영화의 흔적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고 배회한 난삽한 기록이 당신에게 짧은 휴식이나마 줄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표를 끊는 긴 줄 앞에, 홀로 앉은 극장의 옆자리에, 늘 당신의 자리를 비워두겠다. 한 순간도 당신의 손을 놓지 않겠다.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자, 성실한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