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이 열리는 자동차’라고도 부르는 컨버터블. 그간 할리우드영화 속 잘 나가는 주인공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폼나는 차다. 그리고 여기, 머리카락을 맞바람에 맡긴 채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폼나게 질주하는 이 사람. 그는 당연히 웬만한 외모와 재력, 능력과 자신감을 겸비해야 하고, ‘쭉쭉빵빵’한 동승인까지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야말로 폼, 나는 광경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누군가 무식하게(?) 반문한다.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그런 지붕없는 자동차를 타는 건, 매캐한 매연 속을 달리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냐고. 머리카락이 온통 바람에 엉켜버리는 바람에 정신도 차릴 수 없을 거라고. 그러느니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실속있는 경차를 택하겠다는 호언장담까지. 이것은 폼생폼사, 명품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던지는, <신석기 블루스>의 일갈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동명이인의 신석기를 대비시킨다. 웬만해선 같을 수 없는 이름에 변호사라는 직업, 생일까지 똑같은 두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차대조표가 제격이다. 일단, 킹카버전 신석기(이종혁). 최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러닝머신과 신선한 녹즙, 최신 금융소식으로 하루를 여는 그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색의 셔츠들이 꽉 들어찬 옷장 속에서 명품 양복을 꺼내 입고, 폼나는 컨버터블을 타고, 대기업 법무팀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얼꽝버전 신석기(이성재).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서민 아파트에 살면서 닭울음 소리를 내는 고물 자명종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과민성 설사와 천식흡입기를 달고 산다. 상가건물 한 귀퉁이에 위치한 후줄근한 사무실로 출근하는 그의 교통수단은 자전거. 이렇듯 평생 가야 서로의 인생에 절대 영향을 끼치지 않을 듯 보이는 두 사내가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 나란히 선다. 불의의 사고로 둘의 영혼은 뒤바뀌고, 얼꽝 신석기의 육체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킹카의 영혼을 지녔으되 폭탄의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신석기의 모험담은, 이제부터다. 대형 기업의 M&A를 멋지게 성사시켰던 과거는, 잡스런 국선 변호용 서류 속에 흔적도 없다. 분위기 있는 재즈바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면서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생생하건만 지금의 “개미 같은” 체력으로는 트럼펫의 (삑사리가 아닌) 삑소리도 어림없다.
그러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신석기는 점차 삼류인생의 진가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과거 하룻밤 놀이상대로 취급했던 안내데스크 직원 서진영(김현주)에게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되고, 골치아픈 국선변호를 안겨주던 상가 부흥회 주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모아 자신을 돕는 순간에는 구질구질한 이 인생의 묘미를 발견한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삶이 결국은 껍데기에 불과함을 알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성실하게 깔아두었던 복선들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여기에 아무 생각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화장실 유머와 초반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간 주변 캐릭터들이 구사하는 코믹한 상황, 그럴듯한 첩보영화 속 익숙한 장면에 대한 재기발랄한 패러디 등이 덧붙여진다. “이처럼 한심한 인생이 어딨냐”면서 푸념하던 신석기가 진실에 눈을 뜨는 그 순간. 관객 역시 도무지 눈에 익을 것 같지 않았던 이성재의 외모변신에 적응하고,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던 신석기의 과민성 설사병 증상에 정을 붙인다. 부지불식간에 <신석기 블루스>의 결론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앞서 열거한 확연한 대차대조표를 통해 두 신석기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각각의 신석기가 끌어안아야 할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한편으로 평범한 우리네 삶과의 괴리 때문이다. 따라서 잘 나가는 신석기의 일상은 모 아파트 CF 속 모델의 그것처럼 막연하고, 못 나가는 신석기를 둘러싼 모든 것들 역시 지나친 희화화에 의존해 현실성을 가지지 못한다. 이는 진영의 경우도 마찬가지. 요양원에서 투병 중인 장애인 어머니(김청)를 극진하게 보살피는 진영의 캐릭터는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진영 역시 일류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라는 김현주의 해석이 무색하다. 신석기가 과거를 뉘우치거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 자연스런 이입을 방해하는 과잉된 음악과 연출도 문제다. 그럴듯함에 집착할 뿐 정작 실속은 없지 않냐는 컨버터블에 대한 일침,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주제를 풀어나가는 이 영화의 방식이, 또 하나의 형식적이고 막연한 ‘그럴듯함’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결국 비열한 인간의 뒤늦은 성장기는 다소간의 아쉬움 속에 끝을 맺는다. 영화가 제시하는 나름대로 신선한 결말도, 피할 수 있었던 진부함으로 인해 일종의 ‘제스처’에 그친다. <신석기 블루스>가 모처럼 착실하게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업영화임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안타깝다.
::영혼 혹은 육체의 변화를 겪게 되는 영화 속 주인공들
앗, 내 몸이 바뀌었어요
두명의 신석기는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사고를 당하고,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영혼이 뒤바뀐다. “어떤 인생이라도 선택할 수 있었던” 최고의 엘리트 신석기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변두리 인생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는,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이 삼류인생이 그처럼 한심하지 않음을, 오히려 자신이 전부인 줄 알았던 일류인생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처럼 주인공이 겪게 되는 극적인 육체의 변화는 할리우드영화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설정. 초현실적인 변화의 양상이나 결과는 모두 다르지만, 주인공이 일종의 역지사지를 경험하거나 미처 몰랐던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동일하다. 물론 마지막에 우리의 주인공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올 것인가는 이러한 영화에서 긴장감을 더해주는 요소.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이 원상복귀에 성공하는 할리우드식 결말과 <신석기 블루스>의 결말을 비교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수많은 여자를 울렸던 바람둥이 스티브가 여자로 다시 태어나 그간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확인하는 <스위치>(1991)는, 입장바꾸기를 통해 득도에 성공하는 대표적인 영화. 지극한 남성우월주의자가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는 길은 육체가 변하는 길뿐인가. <왓 위민 원트>(2001)는 여자들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읽을 수만 있어도 된다고 말한다. 우연한 사고 이후, 여자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게 된 닉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여자들을 바라봤던 그 잣대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들의 시선이었다. 이처럼 성(性)의 전환은 언제나 민감한 대립항을 통해 관객의 관심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성전환 못지않게 흥미로운 소재는, 바로 ‘나이’. 어서 빨리 나이를 먹고 좋아하는 누나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13살 소년 조슈의 기이한 성장담을 다룬 <빅>(1988)은, 야비한 어른들의 세계에 상처받은 주인공이 유년기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끝맺는다. 최근 개봉했던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2004)은, 지옥 같은 사춘기를 벗어나고 싶었던 제나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소원 그대로 서른이 된 이후를 그린다. 제나는 결국 그 지긋지긋했던 시절, 자신의 곁에 있어줬던 친구와 자신이 혐오했던 그 시절 모두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위치> <왓 위민 원트>가 죽음, 헤어드라이기 감전 등을 변화의 계기로 삼았다면, <빅>과 <완벽한 그녀…>는 같은 초현실이라도 조금 더 마법 같은 설정에 의지한다. 놀이공원의 소원을 비는 기계 졸타와 단짝 친구로부터 받은 생일선물에 뿌려진, 소원을 들어주는 가루가 그것. <신석기 블루스>의 경우 신석기가 심심풀이로 운을 점쳤던 ‘운세재떨이’가, 엘리베이터 사고와 함께 신비감을 더해주는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