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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오> 의 스와 노부히로 감독이 말하는 영화촬영의 비밀
정리 김혜리 2004-12-22

전주국제영화제가 기획한 2004년 하반기 마스터클래스 강연을 위해 최근 방한한 스와 노부히로는 우리에게도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영화감독이다. 데뷔작 <듀오>(1997)에서부터 <M/other>(1999), 그리고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현대에 리메이크하는 과정을 담은 실험적인 작품 <H 스토리>(2001) 등이 국내 영화제를 통해 모두 소개된 바 있기 때문이다. 스와의 영화는 사전에 준비되기보다는 촬영 도중 배우들과의 토론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구성되는 시나리오, 인물과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접근과 분석적 시선의 결합, 지극히 한정된 사적 공간에서 펼쳐지는 범속한 사건들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정적(靜的) 서스펜스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원래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다무라 마사키 촬영감독을 대신한 강연이었지만, 스와는 매우 열정적으로 스스로의 작업방식을 소개하고 나름의 영화관을 피력함으로써 100여명의 청중을 사로잡았다. 다음은 그의 강연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영화 연출은 기본적으로 위치를 정하는 것이며 이때 카메라의 위치와 피사체의 위치를 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나의 첫 번째 영화 <듀오>를 보면 주인공 남녀가 찻집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남자는 뒤통수밖에 안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할 때는 ‘숏-리버스 숏’ 기법을 사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연기를 반복해 연출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느 한쪽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얼굴을 찍게 되면 다른 이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 이것은 좀 과장하자면 영화의 숙명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때 다무라 촬영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요컨대 ‘인간은 어느 한면에만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360도 어디에서든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 찍더라도 상관없지 않겠는가? 왜 꼭 정면에서만 찍어야 하는가?’ <듀오>의 주연배우는 항상 뒤통수만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화면에 비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연기가 상대 여배우에게 마치 표정처럼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화면에 보이지 않아도 그의 연기가 상대역을 맡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 사람의 연기로서 화면에 드러나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다무라의 입장이었다.

카뮈적 시점 - 모르는 것이 있어도 그냥 간다

그때의 깨달음이 지금까지의 내 영화를 결정해왔다는 생각도 든다. 모든 것을 보여주려고 할 필요는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걸로 됐다, 라는 것 말이다. 프랑스의 알랭 로브그리예는 소설 속에 두 종류의 기술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발자크라면 주인공은 몇년 몇월에 어디에서 태어났다, 그는 몇살에 이런 직업을 갖게 되고 이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기술해나갈 거다. 세계의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고 내레이터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편 알베르 카뮈와 같은 소설가의 기술방법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이방인>에서 주인공에게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한다. 그런데 카뮈의 내레이터는 그것이 어제였는지 오늘이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고 그것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기술한다. 여기서는 세계에 관한 확고한 인식이 내레이터 스스로에 의해서 허물어져버린다. 카뮈의 입장은 세계에 대해서 나는 모르는 점이 있다, 하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이야기하거나 쓴다는 것이지만 발자크의 입장은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초창기 영화에선 카메라를 특정한 고정된 위치에 놓고 하나의 숏으로 촬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보하면서 몇개의 숏으로 분할을 하고 분할된 것을 다시 한번 조립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차츰 깨닫게 되었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상당히 대담해지고 그 어떤 곳으로라도 시점이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는 절대로 체험할 수 없는 시각이다. 그런데 영화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미리 간파해 가장 좋은 위치로 순간적으로 이동을 해서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는 시점을 취할 수가 있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하는 발자크적 시점에 가깝다. 그런데 다무라와 함께 <듀오>를 찍으면서 나는 영화에도 카뮈적 시점에 가까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등장인물에 대해서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며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리 눈에 잘 안 보이는 곳으로 갈 수도 있고 우리도 그들의 얼굴을 촬영하는 것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는 바가 많기 때문에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색과 빛을 얻어라

시나리오라는 건 대략 다음과 같은 다이얼로그의 연쇄가 된다. A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B라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거기에 대해서 A라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A와 B의 대화를 감독 자신이 직접 쓰고 있는 한은 엄밀히 말해 A도 B도 나의 타자가 아니라 전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타자는 내가 모르는 사람, 간단하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사실 나는 현실에 대해서도 그런 타자성을 느낀다. 일본에서는, ‘그렇지요?’, ‘이 주스 맛있죠?’ 혹은 ‘이 드라마 재미있죠? 그렇죠?’ 식의 화술이 있다. 이때 대답은 보통 ‘응, 그렇지’다. 이런 식의 물음과 답변을 통해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공동체라는 것이 이루어진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정작 타자성이라는 것은 ‘그렇지요?’라는 말에 의해 사라져버리는 셈이다. ‘당신 생각도 저랑 똑같죠?’라고 묻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일본에서는 그런 타자성을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타자라고 하는 존재는 불가사의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듀오>가 다루고 있는 남녀관계에서는 그러한 타자성이 현저하게 나타날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타자에 대한 존중은 각본을 쓰는 행위로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상상한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영화를 찍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나는 <M/other>라는 영화를 찍었다. <듀오>와 유사한 점이 꽤 많은 영화다. 세 번째로 찍은 장편이 <H 스토리>인데 앞의 두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반기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한 카롤린 샹페티에 촬영감독에 의해 촬영되었는데, 그녀는 다무라 촬영감독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자신이 획득하고자 했던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아주 강력하게 그것을 요구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H 스토리>를 보면 <듀오>와는 달리 프레임 자체가 굉장히 엄격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샹페티에 촬영감독이 그 무엇보다 신경을 쓰는 것은 빛 혹은 빛이 가지고 있는 어떤 색감이다. 영화를 볼 때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느낌이 들지 않는 색이 화면에 나타났다면 그건 촬영한 사람 자신이 그 대상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샹페티에 감독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빛이 가지고 있는 촉각성 혹은 빛의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베아트리체 달 “만남이 전부이며 영화의 시작이다”

이 영화는 베아트리체 달과의 협동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녀를 캐스팅하게 된 것도 샹페티에 감독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좀 난처했다. 프랑스에서 이러저러한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킨 문제아적 배우 베아트리체 달을 일본에 불러서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힘든 일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만나러 가는 것 자체가 굉장히 두려웠다. 그런데 촬영감독이 적극 추천한 터에 만나러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 미리 전해준 시놉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베아트리체 달은 가방 속에서 시놉시스를 꺼내면서 이런 것이야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며 뒤로 내던졌다. 그리고는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과 내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나를 만나러 왔고, 나도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전부이며 영화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녀와 함께 작업하기로 결정했다. <H 스토리>는 내게 굉장히 어려운 영화였다. 히로시마를 도대체 어떻게 찍으면 좋을까, 카메라를 도대체 어떤 식으로 다루어 어떤 것을 찍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무척이나 많이 했다. 그런데 베아트리체 달이라는 배우와 만나고 그녀를 촬영하게 되자 그녀의 얼굴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게 됐다. 그래서 히로시마를 직접 찍을 것이 아니라 히로시마를 찾아온 베아트리체 달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통해 그녀가 체험하고 있는 히로시마를 포착하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히로시마는 나의 개인적인 내면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 소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일들이 생기곤 했는데 가장 혼란스러웠던 일은 도무지 편집을 끝낼 수 없었던 거다. 반년 정도 편집에 매달렸는데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생각하게 된 것이 편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몽타주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다. <듀오>라든가 <M/other>를 만들 때는 주로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흥미가 있었다. 즉 그 영화들은 편집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었다. 그런데 <H 스토리>를 만들면서 영화에서는 역시 몽타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영화에서는 각각의 이미지들이 자립하고 있는데, 자립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것은 바꿔 말하면 하나의 장면을 여러 가지 숏으로 나눠 촬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영화 마지막에 원폭에 맞아 폐허가 된 돔에서 남녀가 함께 눈을 떠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굉장히 아름답게 보였기 때문에 좀더 클로즈업해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실을 샹페티에 감독에게 말했더니 클로즈업으로 찍고 나서 확 뒤로 물러나는 거냐고 묻고 이 영화는 그런 식으로 촬영해서는 안 되는 영화라고 했다. 즉 이 영화는 접근을 하고 난 다음에 뒤로 물러나는 식의, 몇개의 클로즈업과 와이드 숏이 융합된 그런 환영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할리우드영화는 몽타주에 의해서 하나의 환영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모든 것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아마도 영화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는 누구라도 그것이 편집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의존하면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이 혼자 자립해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촬영된 것을 나중에 편집하다보면 물론 원활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각각의 이미지가 하나의 세계를 담고 있으니까.

일부러 끊어지게 편집, 영화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다

일반적으로는 어떤 스토리가 있으면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것이 수월한데 <H 스토리>는 스토리가 없다보니 각각의 이미지가 전혀 연결이 안 됐다. 그때 깨달은 것은 촬영이 끝나고 6개월 뒤에 일부러 연결시키려고 하니까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결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아예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듀오>에도 이미 그런 징조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컨대 여주인공에게 남자가 전화를 걸어 결혼하자고 말하자 여자가 수화기를 떨어뜨리는 장면이 있다. 그 모습을 카메라가 계속해서 포착하는데 갑자기 화면이 격하게 흔들리면서 장면이 커트된다. 촬영감독이 ‘컷’과 함께 카메라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대개 그 흔들리는 부분을 편집과정에서 잘라내버린다. 그런데 나는 그 부분이 꼭 사용하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들었다. 영화를 좀더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그렇게 원활하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영화라고 하는 아주 부드럽고 원활한 세계를 찢어버림으로써 바깥 세계의 공기를 영화 속에다 불러들이고자 했다. <H 스토리>의 경우에는 전체적으로 어떤 프레임도 원활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와 허구라는 것이 어느 정도 무너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나는 허구가 무너짐으로 해서 영화가 포착한 또 다른 현실이 부상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영화란 역시 몽타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은 연결이 안 되는 A라는 이미지와 B라는 이미지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 관계는 영상화되어 있지 않는 또 하나의 이미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의 히로시마의 영상과 베아트리체 달의 얼굴 또는 과거의 히로시마의 영상과 베아트리체 달의 얼굴 그 둘 사이에서 모종의 관계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영화가 아니겠는가?

몽타주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수단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받은 느낌이나 감각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무섭다고 해야 할지 끔찍하다고 해야 할지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동요라든지 불안감이 있다. 의미화되지 않은 이미지에는 그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비행기가 빌딩을 들이받는 그 당치도 않은 사건을 카메라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찍어냈기 때문이다. 리얼리티를 간직하면서 카메라는 모든 것을 마치 영화처럼 찍어냈던 것이다. 이미지 그 자체가 처음에 생방송으로 나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이미지는 편집이 되어, 예컨대 오사마 빈 라덴의 사진 같은 것이 함께 몽타주되어 보여진다. 일단 오사마 빈 라덴과 무역센터가 몽타주되면 우리가 맨 처음 느꼈던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결과라는 식으로 그럴싸하게 의미화되어버린다. 의미화되면서 하나의 스토리가 형성되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안심할 수 있게 된다. 역시 의미가 없으면 불안해지는 법이니까. 극영화의 경우에는 이처럼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불안한 요소들을 억제해서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파편화되지 않은 하나의 의미있는 세계를 몽타주를 통해 형성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안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미지에는 가시적이지 않은 부분도 있으며 이 세계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의 현실만을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전부라고 믿게끔 하고 싶지 않다. 영화 속의 현실을 깨버림으로써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원래의 현실 속으로 되돌리고 싶다. 오히려 세계가 영화 속의 환영의 세계와 결별하는 과정을 통해 거꾸로 우리의 세계와 영화 속의 세계가 연결되면서 교류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영화를 통해, 그 무엇보다 영화를 통해서 모종의 현실성을 회복해보고 싶었다. 철학자인 들뢰즈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신뢰감을 잃었지만 어떤 종류의 현대영화들은 세계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우리에게 회복해주려 시도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를 통해 세계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야말로 지금의 내게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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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제공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