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한국방송사의 산 증인, KBS 성우 1기생들

“이 자리가 어떤 자리냔 말야? 서울 바닥이 전쟁으로 얼룩진 지금의 이라크 같은 시절에, 남자 열 사람 여자 열 사람이 만나서 오늘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란 말야. 그래 현명한 친구들은 5년 지난 쯤에 벌써 알아보고 다들 전업을 했는데 병신들만 오갈 데 없어 50년을 한 자리에서 고추 먹고 맴맴 했다. 자기 책상 하나 없이 외투 입은 채로 밤낮 뜨내기처럼 왔다갔다 하면서 평생을 보냈어. 나 없으면 방송국 쓰러질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말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일이다. 1954년 12월 서울 중앙방송(한국방송 전신) 성우 1기 공개모집에서 남녀 20명이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오승룡, 박용기, 김수일, 고은정, 김소원씨 등이 그들이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라디오 성우는 최고의 스타였다. 애청자들은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시름 많던 세월을 살아냈다.

오는 26일 한국방송 1라디오 〈만남〉

방송입문 50돌을 맞은 이들이 다시 모였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드라마로 풀어낸다. 영화배우 엄앵란 목소리로 유명한 성우 고은정씨가 대본을 쓰고, 성우 1기들이 모두 출연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신원균, 이창환씨도 드라마에 다시 불려나온다. 제목은 <만남>.

드라마는 화자(고은정)가 왕서방(신원균의 별명)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원두커피 애호가로 “죽어서 관 뚜껑 열면 커피만 철철 넘칠 거”라는 말까지 듣던 왕서방에게 화자는 손수 커피를 대접하면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50년대 ‘신문쟁이’들 많이 모이던 상록수 다방, 명동 은하수 다방에 앉아 담배연기 품어내던 백성희씨, 문인들 모이던 청자다방…. 화자는 상록수 다방에서 신익희씨를 떠올린다. “난 상록수 하면 신익희씨 유해가 기차로 서울에 실려오던 날을 잊을 수가 없어. 가랑비가 흩뿌리는 먹구름 낀 날씨에 비통해하는 서울 시민이 서울역으로 모두 몰려가다시피해서 거리가 텅텅 비었는데, 우리만 상록수에 앉아 있었잖아.” 왕서방이 살아왔다는 말에, 박공(박용기)과 오발탄(오승룡), 수일(김수일), 소원(김소원)이 믿을 수 없다며 모여든다. “좋았던 시절, 라디오 드라마 전성 시대”도 있었다고 기억을 되살린다. “어떻게 보면 누릴만큼 누렸지 뭐. 60년대 초부터 갑자기 민간방송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면서 방송사마다 드라마 아니면 쓰러졌잖아? 저녁부터 아침까지 시보 울릴 때마다 드라마였지. 드라마 제목을 아예 7시 드라마, 8시 드라마, 9시, 10시, 11시 그랬으니까….”

그랬다. 56년 한국 최초의 주간 연속극 <청실홍실>로 이들은 본격적인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57년 <산 넘어 바다 건너>, 58년 <장희빈> 등 요즘의 텔레비전 드라마 <대장금> <다모>에 견줄 만한 드라마들이 줄지었다. 순수 문예창작물로 지금도 방송되고 있는 <케이비에스 무대>도 57년 만들어져, 한국 최장수 방송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60년대 들면서 문화방송, 동양방송, 동아방송 등 민방이 잇달아 개국하면서, 동양·동아 두 민방은 14개의 드라마를 편성하면서 치열한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현재 지상파 3사의 라디오 드라마는 한국방송이 5편, 문화방송은 1편, 에스비에스는 한 편도 없다.

라디오 드라마 <만남>으로 한국 방송사의 한 줄기를 엮은 성우 1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만남>은 오는 26일 밤 11시10분 한국방송 제1라디오 <케이비에스 무대>를 통해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