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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과수원을 뒤흔드는 취중진담, <동구 밖 과수원길> 촬영현장
사진 오계옥김수경 2004-12-06

과천 47번 국도 옆 문화농원. 촬영현장 위는 배밭, 아래는 무밭이다. 고양이들은 제철 만나 뛰어다니고 개들은 세상이 떠나가라 짖어댄다. 이곳은 와 <바느질>로 독립영화계의 주목을 받던 홍윤정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35mm 중편 <동구 밖 과수원길>의 촬영현장. 고추씨와 낙엽이 흩뿌려진 마당 중앙에는 오늘 촬영의 주무대인 평상이 보인다. 평상 위의 배우 다섯 중 셋은 전업배우, 나머지 둘은 단편영화 감독들. “형, 잘못되면 필름값 물리는 거 알지?” 홍 감독이 오늘 조연으로 출연하는 박경목 감독에게 한마디 한다. “나만 왜 연기 디렉션을 안 줘.” 뻔뻔하게 딴소리하는 박 감독. 쇠죽을 끓이기 위한 가마솥과 장작들이 촘촘히 쌓인 창고는 촬영장비 보관용으로 변한 지 오래다. 마스터 숏을 위해 집 어귀의 나무 사이에 닌자처럼 몸을 숨긴 카메라와 이강민 촬영감독.

<동구 밖 과수원길>은 난주(이예원)라는 스물아홉살 여자가 하루 동안 겪는 일상을 그린다. 소영과 동성애 커플인 난주. 낚시터에 놀러간 두 사람은 다투게 된다. 난주를 버리고 차를 몰고 혼자 가버리는 소영.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난주에게는 우여곡절이 기다리고 있다.

이날 밤촬영의 시작은 졸지에 과수원의 품앗이로 일한 난주에게 주인인 유정 엄마가 저녁 식사를 권하는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한겨울밤 같은 매서운 날씨에도 배우들은 홑옷 차림으로 촬영에 임해야 했다. 과일이 익어가는 초가을밤이 설정이므로. 덜덜 떨며 식사 뒤 술자리에 앉은 얼굴 넷은 딸 유정(임현진), 그녀와 결혼할 창수(조승연), 창수 친구인 경목, 그리고 난주. 상업영화가 아닌 탓에 엄청난 리허설은 필수. 실제 촬영 상황에서도 홍 감독은 장면마다 평균 대여섯 테이크는 가는 침착함과 고집을 고수했다. 덧붙여 대부분 롱테이크로 구성된 화면구성. “우리는 찍으면 40초야. 한번 실수하면 8만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오간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일출과 함께 진행된 2분가량의 롱테이크. 이 영화에서 제일 긴 장면이다. 게다가 크레인이 동원된다. 내용은 폭탄주를 만들어 네 사람이 벌이는 진실게임. 난주의 취중진담이 좌중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으로 끝맺는다. 다섯 번째 테이크도 OK가 나지 않고 맥주를 거푸 마신 경목에겐 술냄새가 풀풀 난다. 보랏빛으로 물드는 하늘, 10분이 지나버리면 내일 다시 찍어야 한다. 집을 빌려준 아주머니도 닭울음에 일어나고 긴장 백배의 상황. 여섯 번째 슛사인이 나고 2분 동안 고요함이 흐른다. 그리고 전 스탭의 시선이 모인 홍 감독 입에서 떨어진 “OK”. 이렇게 또 현장의 하루가 저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