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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의 땅도 아닌 곳, <노 맨스 랜드>
문석 2004-11-30

그 누구의 땅도 아닌 곳에서 고립된 세 병사의 웃기는, 그러나 무참하게 서글픈 이야기.

보스니아 민병대원 치키(브랑코 쥬리치)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세르비아군한테 동료를 모두 잃고 전선 한가운데 놓인 참호 속으로 피신한다. 세르비아의 신참 병사 니노(레네 비토라야츠)도 전황을 확인하고자 참호로 들어왔다가 치키에게 동료를 잃는다. 이제 적국의 두 병사는 참호 안에서 정면대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치키와 니노는 총을 뺏고 빼앗기며 주도권을 다투지만 상대방을 제거할 수는 없다. 아군이 살해됐다는 사실을 안 적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참호 안에는 또 한명의 병사가 있으니, 그는 대인지뢰 위에 눕힌 채 정신을 잃었던 치키의 동료 체라(필립 쇼바고비치)다. 그가 몸을 약간만 움직여도 세명의 목숨은 순식간에 날아간다. 결국 공멸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세 사람의 이상하고도 위험한 공존이 시작된다.

1992년 유고연방의 한 공화국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촉발된 보스니아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불린다. 회교도가 다수인 보스니아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계는 유고연방의 막대한 지원 아래 내전을 일으켰고, 종전된 95년까지 엄청난 희생을 낳았다. 이 노골적이고 무참한 인종학살 속에서 보스니아인 20만명 이상이 희생됐고, 230만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노 맨스 랜드>는 바로 이 보스니아 내전의 한 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곳은 보스니아 내전의 축소판이자 인간의 전쟁 그 자체를 풍자하는 알레고리의 세계다. 치키와 니노는 힘을 모아야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만 있으면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윽박지르며 심지어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한 여자를 두 사람 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전쟁 전에는 같은 공동체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이들은 참호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동안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불신을 쌓아나가고, 이를 순간순간 터뜨리는 우매함도 보여준다. 참호 바깥에 있는 이들 또한 세 병사의 생명보다는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급급하며 유엔 또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전선을 배경으로 하건만, 이 영화를 보며 줄곧 폭소가 쏟아지는 것은 이처럼 어리석은 군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치키와 니노는 총을 집으면 “니네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해”라고 윽박지르거나 치사한 담배 쟁탈전을 벌이는 등 유아적 행동을 하고, 지뢰를 깔고 누운 체라는 대변 욕구를 참지 못해 안달한다. 전선 최전방에서 경계근무를 하던 보스니아 병사가 신문을 보며 “음, 르완다 사태가 심각하군”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보스니아의 평화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주둔하고 있는 유엔평화유지군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포르노 잡지나 설렁설렁 보고 있던 장교는 상관의 입만을 바라보고, 사령관은 세 병사의 안전보다는 자신의 처신만을 걱정한다. 이 푸른 헬멧의 ‘스머프’들은 진정한 평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식량지원 등 생색내기에만 바쁘다. 전쟁을 그저 잘 팔리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방송사 리포터 또한 세 병사의 이야기를 출세의 디딤판으로 삼으려고 한다. 결국 세 남자는 제목 그대로 그 누구의 땅도 아닌 참호 안에서 고립되고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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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과 휴머니즘을 뚜렷이 내세우는 ‘전쟁 블랙코미디’ <노 맨스 랜드>는, 하지만 무언가를 고발하거나 애써 웅변하려 하지 않는다.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은 보스니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악질적인 ‘인종청소’의 주범 세르비아를 몰아세우기보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짜임새 있는 드라마로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정교하게 얽혀 있는 플롯과 분명한 캐릭터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사뮈엘 베케트라는 이름이 떠오르는 부조리극이다. 이처럼 싸구려 감상주의나 단말마의 흥분보다 여운이 남는 ‘극적 감동’을 통해 감독이 노린 바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선동’이다. 특히 보는 이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덧씌우는 마지막 장면은 이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우리 모두의 행동을 촉구한다. 단언하건대, 산 같은 시체더미나 흥건한 핏물처럼 ‘자극적’인 요소 하나 없이 이처럼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영화는 흔치 않다.

“보스니아인들에게 유머는 살아가는 방법이다. 유머는 거리감을 준다”는 감독의 이야기처럼 <노 맨스 랜드>는 인류 최대의 비극을 이성의 힘으로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영화다. 2001년 칸영화제에서 각본상과 심사위원 대상 특별언급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프랑스 영화비평가협회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았으며, 산세바스찬, 로테르담 등 각종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휩쓸기도 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점 한 가지. 만일 이 영화에 집중하기 힘든 이가 있다면, 그건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열한 전쟁을 생각하노라면 웃음이 전혀 안 나오기 때문일 거다.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 인터뷰

“주제가 심각해도 모두가 보고픈 영화를 만들려 했다”

보스니아에서 태어난 다니스 타노비치는 내전 기간 중 보스니아군과 함께 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전쟁 도중인 1994년 벨기에의 영화학교로 유학을 갔고, 현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노 맨스 랜드>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옴니버스영화 <2001년 9월11일>에 참여했으며, 현재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인페르노>를 제작하고 있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데도 이 영화는 유머러스하다.

나는 이 영화를 ‘훌륭한 유머가 들어 있는 심각한 영화’라고 말한다. 너무 무거워서 아무도 보러가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무거운데도 모두가 보러가는 영화를 만들려 했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는.

빈 라덴을 도운 사람이 뉴욕 시내를 버젓이 걸어다니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이 사라예보의 상황이다. 전범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초점은 그들을 고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각자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두 사람을 보여주려 했다. 그게 전투다.

첫 극영화인데 어렵지 않았나.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은 무엇보다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극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는 만드는 데 있어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다큐가 더 힘들다. 극영화에는 시나리오가 있잖나. 다큐에선 삶 그 자체가 빨리 생각하고 빨리 움직이도록 요구한다.

전쟁터에서 다큐를 찍으면서 전쟁이 첫 극영화의 소재로 걸맞는다고 생각했나.

소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세상에는 사랑에 관한 수천편의 영화가 있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작품은 얼마 안 된다. 그런 점에서라면 전쟁은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아는 것이며 그 소재에 관한 자신의 입장이다.

당신은 보스니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렸다.

지금은 그 누구에게도 2차대전에서 유대인이 희생자였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내가 보스니아인들이 희생자라고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나. 보스니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전쟁에서 보스니아인이 희생자라는 사실을 안다.

이 영화에는 미디어에 관한 주장도 있다.

언론은 갈수록 비즈니스가 되고 있다. 하지만 언론은 비즈니스가 돼선 안 된다.

당신은 앞으로도 전쟁 경험과 무관한 영화를 만들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내가 전쟁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단테는 지옥에 가보지도 않고도 그곳에 관한 글을 썼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 그것을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경험은 도움이 되지만 풍부한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보스니아의 미래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뢰 위의 병사처럼 폭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이 인터뷰는 타노비치 감독이 외신과 가진 인터뷰를 종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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