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17일부터 열리는 레스페스트디지털영화제 2004
199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저해상도 영화제’(The Low Resolution Film Festival)란 이름으로 시작한 뒤, 1998년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레스페스트가 한국에서 개최된 지 올해로 5년째. 더이상 레스페스트를 영화제라 부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제 레스페스트는 ‘디지털’이라는 화두로 가능한 모든 예술적 생산물을 포괄하는 일종의 영상제, 혹은 하이브리드 축제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11월17일부터 21일까지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리는 레스페스트디지털영화제 2004의 슬로건은 ‘상상 대공습!’(Imaginary Attack!) 디지털의 이름으로 가능한 것은 복제와 천편일률적인 재생산뿐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던지는, 상상력의 마지막 경고다. 레스페스트 2004가 선보이는 각종 영상물들은,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눈앞에서 펼쳐질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일단 전통적으로 레스페스트가 최고의 프로그램이라고 자부하는 뮤직비디오 부문에는 몇개의 섹션들이 포진돼 있다. 세계 각국의 최첨단 뮤직비디오들을 선보이는 ‘시네마 일렉트로니카’, 록음악과 애니메이션의 절묘한 만남을 확인할 수 있는 ‘락 뮤직비디오’는 예년에도 있었던 섹션이지만 ‘와프비전’, ‘샤이놀라 특별전’ 등은 올해의 특별 메뉴. 뮤직비디오 외에도 총 75편에 이르는 전세계 최고의 TV광고들을 모아 상영하는 ‘샷츠 2004 베스트컬렉션’과 레스페스트 재팬의 작품을 모은 ‘도쿄 레스 믹스’ 등 해마다 레스페스트에서 접할 수 있었던 익숙한 섹션들이 포진돼 있다. 영화, 음악, 디자인, 애니메이션, 현대미술 등의 서로 다른 장르들이 상상력 하나로 경합하는 영상제인 레스페스트를 즐기는 방법은 극장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킬 빌>의 애니메이션을 담당했던 프로덕션 G.I의 세미나를 비롯해서, VJ(Visual Jockey)의 영상 커뮤니케이션 전 과정을 배울 수 있는 세미나, 각종 전시와 파티, 콘서트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부딪쳐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 축제의 특성상, 추천작을 뽑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개별 작품이나 섹션들을 선별하고 사유를 밝히는 것은, 관심가는 대로 보고 즐기면 그만인 이 파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레스페스트에 처음으로 초대된 누군가에게 건네는 약간의 주석일 뿐이다.
조너선 글레이저 특별전두 남녀가 맨몸으로 질주하는 모 청바지 광고를 기억하는가. 벽을 뚫는 것으로도 모자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오른 나무를 타고 달려나가 급기야는 하늘 위로 도약하는 그들의 모습은, 판매를 촉진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광고이기 이전에 하나의 작품이다. 이처럼 보는 이에게 새로운 감각경험을 선사하는 각종 뮤직비디오, CF를 만들어온 영국 출신 감독 조너선 글레이저의 각종 클립 22편을 상영하는 특별전이 레스페스트 2004의 개막작으로 상영된다. 리바이스, 나이키, 기네스 등 하나같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완성도를 자랑하는 광고와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던 메이킹 클립, 뮤직비디오 대표작들이 푸짐하게 준비돼 있다. 중력장을 벗어난 인물들의 움직임이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Street Spirit>(라디오헤드)(사진)의 뮤직비디오, 단조로운 세트와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자미로콰이의 독특한 움직임과 그의 음악 특유의 리듬감을 살린 <Virtual Insanity>의 뮤직비디오 등을 큰 화면에서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다. 한편 스파이크 존즈, 미셸 공드리 등 뮤직비디오와 CF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가들처럼 글레이저 역시 장편영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2000년 <섹시 비스트>(Sexy Beast)로 장편 데뷔한 뒤 두 번째 영화 <버스>(Birth)를 니콜 키드먼과 함께 만들었으며, 현재는 세 번째 영화를 준비 중이다.
<프리스타일: 라임의 미학>(사진) 미국 l 2004년 l 케빈 피츠제럴드 l 74분실제 상황, 이것은 이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개념이다. 첫째, 유구한 즉흥 리듬의 역사와 그 원류를 살펴보는 이 작품 자체가 실제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둘째, 즉흥 리듬, 프리스타일 자체가 “노래도 아니고, 시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드러나는” 실제 상황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그간 각종 미디어를 통해 왜곡된 채 접할 수밖에 없었던 생생한 힙합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피츠제럴드는 흑인음악 전문가와 80년대 초반 등장한 전설적인 래퍼들의 인터뷰, 그리고 MC들의 결투장면과 공연실황을 통해 이러한 음악을 가능하게 했던 물적 토대와 힙합의 정신을 정교하게 고찰한다. 자신도 모르게 리듬을 넣고 멜로디를 곁들이는 흑인 목사의 연설을 담은 화면은, 그 어떤 책에서 접했던 설명보다도 생생한 힙합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고, 둥그렇게 모여선 길거리의 패거리들 속에서 산발적으로 오가는 랩의 향연은 힙합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이들이 선보이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프리스타일은 미리 적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우연만이 있을 뿐”이라면서 인터뷰마저 랩으로 진행하는 래퍼, “사전을 비롯하여 생활 속의 모든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프리스타일 챔피언, 독설과 폭언보다는 유머와 풍자를 중시하는 결투장면 등은 프리스타일에 대한 종교적이고 이성적인 증언이 되어준다. 부시웩트!이번 미국 대선은 미국인을 포함, 지구촌 곳곳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됐던 일대 사건. 대선은 끝났지만, 조지 부시를 향한 맹렬한 비판 혹은 ‘극악무도’한 비난은 멈출 수 없다. 부시웩트(Bushwacked)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섹션에는 다양한 형식의 부시를 ‘엿먹이는’ 영상물들이 선보인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전세계에서 일어났던 반전집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골때리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버무려 리듬감 있게 편집한 뮤직비디오 <붐>(마이클 무어)을 비롯한 23편의 영상물 중에서 단연 인기를 끄는 소재는 부시의 연설. 연단에서 최면술사처럼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말들을 늘어놓는 부시의 모습을 재현한 <더 보이스>(요한 소더버그), ‘테러, 이라크, 무기’라는 단어를 편집증 환자처럼 나열하면서 이루어졌던 부시의 연설을 그 단어별로 편집한 <테러, 이라크, 무기>(마이크 나우스)도 인상적이지만, 언제나 정확한 수치를 들어 연설하기를 즐겼던 클린턴과 연설 도중 말할 수 없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짓는 것으로 유명했던 부시의 특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영상물 <연두교서>(사진)는 그 풍자의 절정을 장식할 만하다. 이쯤되면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풍자의 묘미요, 영상으로 가능한 몇 가지 소중한 재미 중 하나가 아닐까. 글로벌 단편글로벌 단편은 총 3섹션으로 나뉜다. Birth, Between, Rebirth로 단락지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는 인물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포착한 <죽음의 의식>(사진)(다니엘 아스킬)은, 최첨단 기술을 이용한 기발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영화 10편으로 이루어진 섹션 단편1의 대표작. 절묘하게 꼬인 유머를 통해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을 가하는 작품으로 이루어진 단편2에서는 코카콜라를 비롯한 각종 패스트푸드들의 광고장으로 뒤바뀐 학교를 비판하는 <브랜드 스팽킹>(존 폴-하니)이 눈에 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온갖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독일의 미니멀리즘 작가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로즈마리>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룬 작품 7편을 상영하는 단편3에 속해 있다. 하나같이 최첨단의 영상 기술을 자랑하는 현란한 비주얼이 정신을 잃게 만들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견고한 정치적, 철학적 토대를 확인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와프비전실험적인 전자음악을 주로 발매하는 한편, 전자음악과 완벽하게 조응하는 시각이미지를 함께 만들어왔던 영국의 와프 레코드. 일개 레이블에서 출시된 영상물을 모아 하나의 섹션까지 마련한 것은, 이 레이블이 단순히 음반이나 비디오를 판매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 장르를 좀더 제대로 즐기기 위한 각종 실험을 마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와프비전은 와프 레이블의 15주년을 맞아 그간 와프 레코드가 뮤직비디오에 기여한 바를 살펴보는 자리. 1991년부터 2004년까지 만들어졌던 와프의 대표적인 영상물 19편이 상영된다. 언뜻 단조롭게 들릴 수도 있는 전자음악을, 가장 흥미로운 영상으로 표현하는 절묘한 방식들은, 한 장르의 음악과 영상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호러영화보다도 섬뜩한 긴장감으로 가득한 크리스 커닝엄의 전설적인 작품 <Come to Daddy>(에이펙스 트윈) 디렉터스 컷은 놓칠 수 없는 수작이다.
글 오정연 miaw@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