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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8] - 가린 누그로호 감독
김현정 사진 조석환 2004-11-08

“똑같은 나무의 숲보다 한 그루 특별한 나무가 되려 했다”

아시아 감독과의 조우3 - 인도네시아의 대부, 가린 누그로호 감독

투박한 외모를 가진 가린 누그로호는 거친 땅을 일구듯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1991년 <사랑은 빵 한 조각>으로 데뷔한 그는 외국영화를 철저하게 규제했던 인도네시아 정부 때문에 책만 읽으면서 영화를 배웠다. “책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나는 스스로 이미지를 만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매우 아름다운 시간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이 붕괴한 1980년대에 혼자 살아남았던 그는 마치 여러 감독이 존재하는 것처럼 다양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 모국의 공백을 채워넣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베개 위의 잎새>는 거리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배우로 기용해서 만든 영화다. 가린은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이 영화에 어떤 감상도 섞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기록했다. 웃음과 눈물과 짝사랑과 죽음이 있는 이 영화는 매우 어두운 결말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와 이국 관객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예술영화에 몰두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대사가 거의 없는 <달의 춤>은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처음 가져다준 영화였지만, 국내에서는 강한 거부에 부딪혔다. 누벨바그, 특히 <쥴 앤 짐>에서 영향을 받은 <사랑은 빵 한 조각>, 다큐멘터리 필름을 픽션과 결합한 <새인간 이야기>, 폴라로이드 사진과 함께 매혹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천사에게 쓰는 편지>는 모두 다른 색채로 다른 가린을 보여준다. 모든 미디어를 융합하려는 듯한 가린의 여행은 미완성 스테인드글라스와도 같다. 그는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젊은 감독들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감독이기도 하다. 정부와의 싸움도 불사하면서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온 그는 황무지에 씨를 뿌려 숲으로 키워내려는 야심과 책임감을 품고 살아간다.

-<베개 위의 잎새>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당신의 초기 경력을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당신의 다큐멘터리 <칸실의 자유이야기>에 등장한 칸실을 배우로 쓰기도 했다.

=나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결합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얼마 전 <새인간 이야기>를 만들 때도 그전에 찍어둔 다큐멘터리 필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인도네시아 주변부에 있는 마이너리티, 거리 아이들의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 인도네시아영화나 미디어는 마이너리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의 어두운 부분이지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에 관객은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베개 위의 잎새>는 다행히도 꽤 많은 사람들이 보러왔다. 이 영화는 현실에 가깝지만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사랑도 있다.

-당신이 만든 장편영화 일곱편은 모두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다. 매우 드문 경우다.

=영화를 만드는 건 알파벳 글자들을 사용하는 일과 비슷하다. 글자를 섞어 어떤 문장이라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내 안에는 언제나 새로운 욕망이 자라나고 있다. 눈과 귀를 모두 사용해 일상을 대하다보면 위기를 감지하는 감각이 생기고,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진다.

-<베개 위의 잎새> 이전에 당신은 난해한 예술영화 <달의 춤>을 만들었다. 제작비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믿음과 사랑. 내가 가진 건 그 두 가지가 전부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선 최소한 2년 동안은 길고 지루하고 피곤한 협상을 거쳐야 한다. 상업영화라면 훨씬 빠르겠지만. 특별한 시스템도 없다. 하지만 나는 단 1%에 불과하더라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 돈이 될 수 있는, 똑같은 나무만 들어찬 숲보다는 전혀 쓸모없어도 오직 한 그루 존재하는 나무를 아껴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인도네시아 젊은 감독들은 당신을 대부처럼 대한다. 당신은 한명의 영화감독일 뿐만 아니라 젊은 감독들을 키우는 스승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에선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만 연출을 할 수 있도록 법규로 정해놓았다. 재능있는 젊은이는 15년은 기다려야 감독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싸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자카르타 예술원 영화학교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경험없는 스탭들을 쓴다. 영화 퀄리티가 떨어지더라도, 나는 선생이므로, 기회를 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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