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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과 화엄경이 만난 종교영화 <빈 집>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김기덕의 영화가 종교적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혹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때 ‘폭력에서 종교’로 변절한 것 아니냐며 휘둥그레했지만, <파란 대문>이나 <나쁜 남자>도 이미 충분히 종교적이었다. 단,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단어는 ‘현실 종교적’이라는 협의가 아니라, ‘종교의 원형질’에 가까운 광의로 이해해야 한다. ‘종교의 원형질’이란 이를테면 ‘성속일여’(成俗一如)의 주제를 ‘원초적 상징’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파란 대문>에서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 이적을 보고도 ‘비유로 말씀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나쁜 남자>에선 긴 찬송가가 흘러나왔건만, ‘귀가 있는 자’가 적었는지, 달이 아닌 손가락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았다. 오해에 지쳤는지 너무도 솔직하게 <봄 여름…>에서 네이키드 쇼를 펼쳐 보이자, ‘김기덕 영화 같지 않다’는 소리가 오갔다. 갑갑한 노릇이다. 그래도 불교의 이미지로 기독교 정신을 그린 <봄 여름…>을 보고, 알아듣는 귀가 늘어났다. 그러자 아예 ‘사마리아’와 ‘바수밀다’라는 종교적 아이콘으로 심판과 구원이라는 오래된 딜레마를 다룬 영화 <사마리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해외영화제 수상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여전히 아이콘만 문제삼을 뿐 영화의 주제에 관한 토론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사마리아>를 일종의 ‘사회 고발극’으로 이해하여, 아버지의 사랑이 눈물겨웠느니, 아버지의 복수가 시원했다느니, 하는 뜬금없는 감상이 논의되기도 했다.

하기야 잘된 종교극은 사회극으로도 읽혀야 제격이다. 종교가 사회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마리아>는 <봄 여름…>보다 한발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종교극과 사회극이 혼융되지 못하고 중의성이 투박하게 표출되는 흠이 있었다. 이에 비해 <빈 집>은 사회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가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합체되어 있는 매끈한 영화이다.

사회적 의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안으로부터 폭파하는 뇌관

집은 사적 소유의 결정체이자 사적 권력의 장이다. 남자들은 자기 집을 짓고, 그 안에서 가족을 지배한다. 집을 갖지 못한 남자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바깥에 놓인 자, 즉 축출된 자이다. 여기 집과 집의 틈새를 파고드는 이가 있다. 빽빽이 들어찬 소유의 성곽에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빈틈을 찾아 잠시간 머물며 떠돈다. 그는 집도 가족도 갖지 않으며, 가진 것은 이동수단(오토바이)과 침투수단(열쇠 연장)뿐이다. 그는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아무런 소비재도 갖지 않으며, 남의 집에 들어가 그 안에 갖추어진 것들로 일상을 영위한다. 대신 그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 생활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능력을 지녔다(소유냐 존재냐 묻는다면, 그는 소유는 0, 존재는 100이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일종의 바이러스이고, 정치적으로 보자면 진정한 아나키스트이며, 철학적으로 보자면 노마디즘의 구현자이다. 무엇으로 보든 그는 세포나 체제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좀’이다.

여자들은 안락한 집을 꿈꾸며 그것이 자기 집이라 헛되이 믿는다. 그러나 집안에서 여자들은 지배된다. 피지배 신분이 노골화된 여자에게 ‘스위트 홈’의 꿈은 조각난다. 여기 자기 집(아니 남편 집)에서 유폐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과 무응답 외에 적절한 저항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제 집에서 안으로 닫힌 채, 죽은 듯 없는 듯 숨어 있다. 남의 집에서 제집처럼 버젓이 행동하는 사내와 제집에서 없는 듯 숨어 있는 여자의 눈이 딱 마주친다. 다행히 그녀는 생의 의지마저 괴멸된 <인디안 썸머>의 ‘조롱새’보다는 아직 건강한 정신이 남아 있어서 이제 그를 따라 나선다.

이 영화는 지금껏 김기덕 영화에서 흔히 문제삼던(즉 중류계층 여성에 대한 하류계층 남성의 폭력이라 논의되던) 남녀관계에서, 더이상의 오해를 막기 위하여 남성 캐릭터를 남편과 태석으로 분리시킨다. 이전의 영화들의 가학하는 남성상을 부르주아 남성으로, 그리고 이전 영화들에서 여주인공의 내면에서 감지될 뿐 비가시적이거나 남자주인공의 캐릭터 속에 분리되지 않은 채 들어 있던(가령 <나쁜 남자>의 한기) 초월적 남성상이 태석으로 분리 현현한 것이다. 즉 이전 영화들에서 가학하는 남성상에 감독의 의도가 들어 있다던 참혹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남편을 반동인물로 삼고, 그동안 암시되기만 했던 초월적 남성상을 주동인물로 삼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화의 사회적 의미가 온전히 추출된다. 즉 <빈 집>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로부터 축출된 남자와 소외된 여자가 연대하는 이야기이자, 소유와 지배에 의해 지탱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그 최소단위인 부르주아 가정에서부터 내파(in-plosion)시키는 뇌관에 관한 영화이다.

종교적 의미: 요한계시록과 화엄경의 만남

그녀 입장에서 태석은 말하자면 ‘성령’이다. 그녀는 혼자 극복할 수 없는 고난지경에서 ‘어디에나 거할 수 있는 그’의 방문을 접한다. 그리고 존재 전체를 거는 용기로 그를 따라 나선다. 그녀는 지금껏 안착한 자신의 삶을 버리고 거듭나기 위해 그와의 동행에 적극 참여한다. 자신의 파편화된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진변형작업을 통해 이를 표현한다. 그가 하듯 손빨래를 하여 노동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며, 그에게 가위를 건네며 자신의 변모를 부탁한다. 끊임없이 그와 소통하기를 시도하는 그녀는 흡사 기도원이나 수련회에 가서 열심히 간구하는 신자의 모습이다. 그녀는 그가 무고하게 고통받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집으로 돌아와, 훨씬 강해진 내면으로 남편에게 저항하며 태석을 기다린다. 그녀는 늘어진 저울을 조이며 현실을 교정하려 하고 그와의 장소를 순례하며 안식을 얻는다. 그가 재림하였을 때 그녀는 그를 느끼며 기쁘게 맞이한다.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그녀의 희열은 불쌍한 남편마저 행복하게 해준다. 그녀는 현실의 남편 너머에 있는 태석을 보며 환희에 차고, 이로써 주·객관적인 현실관계를 변화시킨다. 실로 주님을 영접한 상태이다.

한편 태석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깨달음을 구하는 스님이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을 떠돌며 머문 곳의 주인들을 위해 뭔가를 고쳐준다. 그러나 관계를 충분히 고려치 못한 고지식한 ‘도움’은 때로 위험을 초래(장난감 총)한다.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아집으로, 묶인 골프공을 쳐대는 그는 그녀와의 소통에도 미숙하다. 그의 미흡함은 날아간 골프공의 모습으로 치명성을 보여준다. 그에게 그녀는 흡사 화엄경의 ‘여성재속신자’이다. 고통받는 속세의 여인이었으나 깨달음의 가능성을 지닌 그녀는 그와 대화하고자 하며, 자신과 같은 처지인 묶인 골프공과 빈집에서 죽은 노인을 연민하여, 태석이 피하고자 했던 시신을 거두자 한다. 그는 그녀를 만나 깨달음의 단초를 얻고, 빈집에 스미던 자에서, 최후의 집인 자신의 몸마저 비우고, 마침내 ‘유령’이 된다. 그는 그녀를 만나 깨닫고 자신의 번뇌와 집착을 벗었고, 그녀는 성령인 그에게 자신의 모든 짐을 맡겼으니, 함께 저울에 올라갔을 때 그들은 각자의 수고로운 짐에서 벗어나 무게가 제로가 된다. 거룩하고 단순하고 심오하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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