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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퍼> 절망만 남길 사랑 오지나 말지

그리스의 거장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침묵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영화인 〈비키퍼〉(The Beekeeper, 그리스어 원제는 멜리소코모스)가 27일 개봉한다. 1986년 영화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비키퍼〉는 앙겔로풀로스 영화 가운데 가장 관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로 보인다. 스토리가 분명하고 쉬우며, 〈8과 1/2〉 〈해바라기〉 등으로 낯익은 유럽 대표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주연을 맡았다. 또 ‘침묵 3부작’의 첫번째 영화 〈시테라섬으로의 여행〉(84년)이 ‘역사의 침묵’을, 세 번째인 〈안개 속의 풍경〉(88년)이 ‘신의 침묵’을, 그 사이에서 〈비키퍼〉가 ‘사랑의 침묵’을 얘기하고 있다고 말해지듯 이 영화에 담긴 사랑의 모티브는 잘 만들어진 한 편의 멜로영화처럼 만남의 떨림과 이별의 시림을 전달한다.

이야기는 간결하다. 교사에서 은퇴한 스피로(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는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겠다는 아내도 도시로 떠나보낸다. 혼자 남아 트럭 뒤에 벌통을 싣고서 야생의 꽃들을 찾아 벌을 풀어놓고 다시 담으며 길을 떠돈다. 벌치기를 하는 동료들도 수가 줄어간다. 쓸쓸한 노년이지만 자기 심경을 정돈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이 말쑥한 노인에게 딸 또래의 젊은 여자가 나타난다. 가출한 듯한 이 여자가 스피로의 트럭에 동승하고, 숙소까지 따라온다. 스피로는 점점 여자에게 빠져들고 둘은 잠깐 동안 뜨거워지지만 결국 여자가 떠난다.

그리스의 거장 앙겔로풀로스 ‘침묵 3부작’ 중 두번째. 노인과 여자, 잔인한 이별

스피로가 혼자 버텨낼 수 있었던 건 스스로 행복해지고 싶은 욕구 앞에 담담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터. 여자를 만나서 그게 무너지고, 그 여자마저 떠나고 난 뒤엔 지탱할 힘이 없다. 희망은 그렇게 잔인하기도 하다. 애초 기대하지 않고 있던 이에게 찾아와선 황폐함만 확인시키고 떠난다. 영화에서 여자를 만난 뒤 스피로가 보이는 행동은 그걸 예감한 것 같기도 하다. 뭔가를 정리하듯 추억이 남은 공간과 사람들을 찾아다닌다. 그중에 하나가 친구가 장기간 입원해 있는 병실이다. 이 친구는 거기서 수시로 손가락으로 책상에 모르스 부호를 두드린다. 이 모르스 부호는 스피로와 그의 친구들이 전쟁 세대였음을 알려주면서 영화 속의 현재 시대와 이 세대간의 단절감을 좀 더 육중한 것으로 만든다.(‘스피로’는 44년 파르티잔에게 체포돼간 앙겔로풀로스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앙겔로풀로스의 다른 영화들처럼 쇼트 하나하나가 긴 화면이 이 영화에서는 종종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동반한다. 젊은 여자가 옆 침대에 다른 남자를 데려와 섹스를 할 때 스피로의 표정과 행동은 큰 굴곡이 없음에도 혐오감과 질투, 욕정과 무기력감을 전한다. 스피로와 여자가 몸을 섞을 때 여자의 몸을 비추는 카메라는 관능적임과 동시에 스피로의 시선을 대체하면서 둘이 겪은 물질적 시간의 격차를 드러낸다. 그 틈이 쉽게 메워질 것 같지 않게 다가올 즈음에 다음 장면에서 여자가 떠난다. 상실감은 그렇게 예견돼 있지만, 그 길을 곧장 걸어가는 스피로의 구부정한 등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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